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의 달동네 판자촌에 살았다. 가난하지만 인정이 흐르는 동네였다. 깊은 밤이 되면 그곳은 마치 한국의 나폴리처럼 아름다운 항구의 풍경이 되기도 했다. 산등성이 빼곡하게 들어선 판자촌의 불빛은 밤하늘 별들처럼 반짝였다.
학고재가 27일 오픈한 정영주(52)의 개인전 <어나더 월드 Another World> 출품작을 보면 한국전쟁을 겪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출품작 28점은 정영주 작가가 어린 시절 가족과 살았던 부산의 달동네 풍경들이다.
작가의 기억 속 달동네는 일과에 지친 이들의 안식처이자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보금자리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부산 고향의 산동네 집들이었어요.”
프랑스 파리 에꼴 데 보자르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는 1998년 IMF 외환위기를 맞아 귀국한 후 유년기를 보낸 부산 고향의 산동네 풍경을 떠올렸다고 한다. 어린시절 숱하게 보아온 풍경을 화폭에 담으면서 그는 당시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치유받았다고 한다.
작가는 화폭에 어린시절 가족과 옹기종기 붙어살던 달동네 풍경을 담아내면서 내면의 고통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한다. 캔버스 위에 한지를 오려 붙이는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서로를 의지하듯 기대고 서있는 판잣집의 형상을 종이로 빚어낸 후 물감을 채색한다.

작품 속 산동네 풍경은 잿빛 판자집 지붕이지만 그 사이로 뽀얀 등불들이 희망의 상징처럼 드러나 감동을 준다. 좁은 골목길을 따스하게 밝힌 가로등 불빛이 가족의 온기와 고향의 정감을 자아낸다.
지난 5월 아트 바젤 홍콩에서 정영주의 출품작은 전부 판매되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의 인기도 인정받았다. 개막에 앞서 바젤 홍콩 주최측도 공식 인스타그램에 정영주의 작품을 피드(feed)에 올리며 적극 소개하기도 했다.
전시 도록의 서문을 쓴 미학자 이진명은 정영주 작가는 “정서의 회복과 회화의 복권을 위해서 화폭 안 세계에 빛을 밝힌다”고 했다.
가난하지만 사람 사는 소박한 인정미가 넘치던 시절, 온가족이 한방에 온몸을 포개다시피 살아도 부족함이 없던 시절 이야기다. 이웃끼리도 인정이 넘쳤다. 부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작가는 산동네를 내일을 꿈꾸는 보금자리로 그려냈다.
그의 회화 속 어둠이 내린 판자촌은 정겹다. 그만그만한 집들에서 따스한 불빛이 흘러나온다. 그림을 보면 온갖 상상력이 증폭된다. 낮에 힘들게 지낸 가족들이 옹기종이 모여있을 것 같은 곳이다.

그림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 반가움은 결국 그리움이자 노스탤지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하지만 인정이 메마른 비대면 시대와 다른, 그때 그시절에 대한 향수나 동경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리네 정서와 맞닿는 한지를 선택해 천천히 빚고, 한 겹 한 겹 쌓아 올린다. 그렇게 입체적으로 완성된 집의 형상에 색채를 입힌다. 마지막으로 화면 곳곳을 비추는 빛을 그린다. 전시는 8월2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