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사람, 무소유 뜻을 무색하게 만들어...
지난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의 저서 ‘무소유’가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기를 부탁한다”는 스님의 유언과는 다르게 부르는 게 값이 되고 있다. 1976년 첫 출간된 뒤 330만부 넘게 팔려나간 ‘무소유’를 낸 출판사가 스님의 뜻을 존중해 더 이상 책을 내지 않기로 하자 “일단 사 놓고 보자”는 충동 구매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특히 중고서점에서는 15만원 호가하고 있고, 한 인터넷 경매에서는 중고책 한 책이 21억원까지 올라 책을 소유하고 있던 속세사람들이 경매에 붙이는 판매자들이 늘고 있는 형편이다. 일부 판매자들은 “책을 판매해서 받은 돈을 좋은 곳에 쓰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법정스님의 뜻이 무색해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한국출판인회의가 최근 전국 주요 서점 11곳의 판매량을 집계한 결과, 법정스님의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가 정상을 차지했고 스님의 다른 책 7권도 20위 안에 들을 정도로 스님의 욕심없고 가진 것이 없는 일상 생활을 배우고 싶은 속세사람들이 많아 진 것으로 보인다. 스님이 이끌던 봉사단체 ‘맑고향기롭게’가 스님의 유언장을 공개하며 “독자들을 위해 언제든지 스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하여 스님이 창건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 내 도서관에 스님의 모든 저서를 전시와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책의 한구절을 보면 스님이 암자에서 화초를 길렀는데 어느날 화초를 밖에 잠시 내어놓고 밖으로 외출을 하였은데 얼마안가서 소나기를 맞았다한다. 스님은 소나기를 맞자 화초가 생각나 다시 암자로 돌아와 화초를 안으로 들어놓고 다시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문득 생각난 것이 화초도 소유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셨다한다. 그래서 그 화초를 친분이있던 지인에게 주었다한다. 그 화초는 작은 난이었다한다.
법정 스님은 가진 것 없는 스님
법정스님은 법랍(法臘) 55세. 세수 78세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다. 법랍은 불가에서 쓰이는 용어로 좌랍(坐臘) ·계랍(戒臘) ·하랍(夏臘) ·법세(法歲)라고도 한다. 다시말해 속인(일반인)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해부터 세는 나이다. 세수는 일반나이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한 스님(속명 박재철)은 1955년 당대 선승이었던 효봉 스님(1888∼1966)과 대화를 나눈 뒤 그 자리에서 불교에 귀의했다. 특히 1975년 송광사 뒷산 불일암을 짓고 홀로 지냈을 당시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했다. 무소유는 말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스님의 에세이 정신은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정치권에서 보여주는 기득권 싸움과 올해 있을 지방선거에 표를 획득하기 위한 세력확장의 모습에서 스님의 일대기로 큰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스님은 전통신앙으로부터 현대의 사상시장에 새로 옷 입힌 불교의 정신을 보여주었고, 불교 신앙을 오늘의 현실로 표현했고, 끊임없이 사랑과 증오의 사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현실에 끌어내었다.
스님의 글들은 대부분 짤막하여 일상 내지 세속잡사(世俗雜事)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새로이 발견하는 불교의 현대적 모습이다. 스님을 통해 나타나는 불교는 체념과 도피, 초속(秒速)과 허무(虛無)의 그것이 아니라 참여하고 괴로워하며 비판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담아냈다. 스님은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무소유’라는 말처럼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사찰 주지를 한 번도 맡지 않았다.
1970년 초 대한불교신문(현 불교신문)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날카로운 필력을 드러냈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하게 되어 당시 정부기관원들이 절에 살다시피 하면서 감시는 물론 툭하면 연행해 간 일화가 유명하다.
스님은 입적 이틀 전에 만난 6촌 조카인 현장 스님에게 “내 소원이 뭔지 알아? 빨리 몸 벗어나서 하루빨리 다비장 장작불에 들어가는 거야”라고 말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스님은 이유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하겠다”
스님은 2007년 관절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간 김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폐암진단을 받았다. 스님은 “육신에 손을 대면서까지 삶에 집착한다"하여 애초에 수술을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주변에서 설득과 함께 미국에서 수술받기를 강하게 권유하여 미국 휴스턴 암 전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올해 초, 스님에게 암이 다시 찾아왔다. 스님은 지난 1월 말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했지만 나이지는 기미가 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에도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라며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관을 짜지 말고, 사리를 수습하지 말고, 만장(挽章)을 하지 말라”고 유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언에 따라 길상사에는 소박한 분향소를 마련하였으며, 다비식을 위해 출가 본사(本寺)였던 전남 순천 송광사로 향할 때도 스님의 법구는 관 대신 스님이 강원도 오두막에서 쓰던 것과 같은 나무 평상 위에 평소 입던 가사를 덮고 있었다. 법구는 극락전 앞에서 부처님께 간단히 예를 드린 뒤 장의차에 올려졌다. 스님의 마지막 가는길에 아주 호사(?)스러움이 될지 모르는 장의차는 캐딜락 리무진이었다.
스님을 맞이한 송광사도 한지에 ‘비구법정’ 이라고 쓰여진 소박한 위패와 꽃장식도 없는 영정과 함께 문수전에 모시었고, 분향소를 차렸다. 또한 만장도 만들지 않았다.
스님의 유언에 따라 영결식 없이 법구가 안치돼 있던 문수전에서 800m 거리의 다비장까지 스님과 추모객 만 5천여명이 뒤따르는 가운데 운구됐다. 법구는 장작더미와 숯으로 만들어진 인화대 위에 안치하고 장작에 거화(擧火)되면서 바로 다비식(화장을 해 유골을 거두는 의식)을 봉행됐다. 많은 스님들과 추모객들의 불경속에 스님의 법구는 세상밖으로 떠나갔다.
24시간 동안 계속된 다비식은 스님의 유골을 사리를 찾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에 따라 유골을 수습한 뒤에 뼈를 빻는 쇄골을 곧바로 진행했다. 유골은 부도탑에 안치되는 대신 법정 스님이 정진했던 강원도의 산골 오두막 부근이나 송광사 부근 등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 뿌려질 예정이다.
우리는 물적으로 지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또 많이 소유하려고 한다. 디지털 시대의 무소유 정신은 어떤 것인지 우리가 생각해 문제다. 생활에 쫓겨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마음만으로도 아무 것도 가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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