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30년 동안 철권통치를 해 왔지만 성난 민심에 의해 결국 퇴진했다.
이집트 민초들의 승리로 끝난 이번 이집트 혁명은 지난달 25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와 수에즈, 알렉산드리아 등 주요 도시에서 각각 수천 명이 모여 반정부 시위로 시작됐다. 이집트 민초들은 ‘경찰의 날’을 ‘분노의 날’로 이름을 정하고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과 정치ㆍ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무바라크 대통령과 하비브 알-아들리 내무장관의 사진을 불태우기도 했고, 노동자들은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무바라크 정권은 한때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가택연금하고, 야권 인사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반정부 시위자를 연행했고, 거리 행진과 시위금지, 인터넷 차단 등 강경대응을 했다. 언론인을 구금하거나 폭행하는 일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침묵을 지켰던 이집트 군이 시민들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반정부 시위가 고조에 이르렀다.
사태가 더 악화되자 무바라크 대통령은 내각 총사퇴와 함께 정치·경제 분야에 대한 개혁약속을 했으나 성난 민심은 숙으려 들지 않았다. 더욱이 무바라크 대통령은 하야의 뜻이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자 급기야 민심은 극에 달했고, 무바라크 대통령은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번 이집트 ‘타흐리르(Tahrir) 혁명’은 정치ㆍ경제개혁 요구도 있지만 식품 가격상승에 대한 불만과 함께 무바라크 대통령이 또다시 올해 대선에 나선다는 설,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 집권 국민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에게 권력을 승계한다는 말이 나와 촉발됐다.
우리와 같은 듯 다른 ‘아랍의 봄’
아랍국가에서 권력세습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이제 아랍국가 국민들은 이를 그냥 넘기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지난 1월에 일어난 튀니지 혁명은 국화인 재스민에서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이라고 불리고 있다.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튀니지는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가 1987년까지 장기집권했고, 그 뒤로 정권을 잡은 이어 지네 알 아비디네 벤 알리가 올 1월까지 23년간 장기집권하면서 친인척들이 은행, 언론사 등을 소유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튀니지 국민들은 높은 물가와 부족한 일자리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 때, 튀니지 중부도시 시디 부지드에서 ‘무하마드 부아지지’라는 26세 청년이 대학은 졸업했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과일 노점상을 했다. 그러나 경찰이 단속하는 과정에서 부아지지를 공개된 장소에서 얼굴을 때리는 등 모욕을 했다. 부아지지는 이에 항의하고자 분신을 했고, 분신 뒤 시디 부지드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지난달 4일 부아지지가 사망하면서 시위는 수도 튀니스를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자 벤 알리 대통령은 군에게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리나 군은 대통령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여 벤 알리는 바로 그날 외국으로 달아났다.
이런 모습이 우리 4·19혁명과 비슷한 면이 있다.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만들면서 영구집권을 꾀했던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대통령 부정선거를 하자 마산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져 경찰이 발포해 8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 때 행방불명됐던 17세 김주열이 최루탄에 눈부터 뒷머리까지 관통당한 처참한 시신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고,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또다시 폭발하했다. 특히, 시위대를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군이 시위대 뜻과 함께 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했다.
한편, 이집트 시민들은 반정부 시위로 인한 어수선한 틈을 타 약탈과 방화가 벌어지자 자치경비대까지 구성해 스스로 치안유지에 나섰다. 자치경비대는 교통, 청소, 치안, 비상사태 네 영역으로 나눠서 일을 했고, 자치경비대임을 나타내기 위해 인민위원회라고 쓴 배지를 달거나 팔에 띠를 찼다. 시위로 인한 부상자를 위해 헌혈이 이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어 이 또한 우리 5·18광주민주화운동과 비슷하다.
튀니지 혁명의 도화선이 위키리크스와 트위터를 통해 정권의 부패를 폭로한 정보 확산이었고, ‘타흐리르 혁명’도 소셜 네트워킹을 통한 인터넷이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된 모습이 2008년에 일어난 우리의 촛불시위와 비슷하다.
시민이 이끈 ‘타흐리르 혁명’
이번 ‘타흐리르 혁명’에는 뚜렷한 구심점은 없었지만 30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힘은 시민의 힘이었다. ‘4·6 청년 운동’이 전면에 나서는 가운데 ‘개혁을 위한 국민연합(NAC)’, ‘무슬림 형제단’ 등이 시위를 이끌었고, 일부 야권세력이 움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6 청년운동’은 지난 2008년 북부 산업지역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로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킹을 통해 처음 실체를 드러낸 뒤 그 해 4월 6일 전국적인 파업을 벌이면서 ‘4·6 청년 운동’ 이라는 명칭을 갖게 됐다. 조직원 대부분이 고등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로 이집트 내 다른 조직 보다 경찰의 체포 위협에 맞서 행동했던 단체다.
이에 비해 ‘NAC’은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IAEA 사무총장이 오랜 외국 생활 이후 귀국해 이집트 개혁을 목표로 출범시킨 연합체로 투쟁성은 떨어지지만 야당 지도자와 이슬람 청년 조직, 저명한 지식인, 활동가 등 무바라크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포함하고 있다.
또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이슬람 조직으로 가장 조직력이 뛰어난 반대세력으로 꼽히고 있다. 과거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과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맞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등 막강한 대중 동원력을 과시해 무바라크 정권에 의해 불법 조직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온건파가 장악한 뒤 반정부 시위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이번 혁명에 어느 정도 가담했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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