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송경호 기자] 여배우는 불리는 순간부터 편견과 싸워야 한다. 남배우는 배우인데 여배우는 굳이 '여(女)' 배우다. 뮤지컬 무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20~30대 여성이 지지층이다 보니 남자 배우들 위주로 진용이 꾸려진다.
김지우(32)의 출연 목록을 살펴보면 곧 그녀의 고군분투기다. 2001년 MBC TV '맛있는 청혼'으로 데뷔한 뒤 상큼한 매력으로 인기를 누렸고 2005년 뮤지컬로 활동 반경을 넓힌 뒤에도 같은 이미지를 이어갔다.
하지만 2011년 '렌트'의 미미 역으로 슬픈 청춘의 자화상의 궤적을 좇은 이후 배우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닥터 지바고' 초연의 '라라'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첫사랑 '롯데'로 고전적인 면모를 뽐냈다. 1920년대 뉴욕이 배경인 뮤지컬의 고전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순수한 '사라'를 맡아 이런 이미지를 더했다.
재공연을 앞둔 프랑스 라이선스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김지우의 경력에 방점을 예고한다. 뮤지컬에서는 이례적으로 여주인공이 전면에 나선다. 바로 '스칼릿 오하라'다. 미국 소설가 마거릿 미첼의 소설이 원작으로 비비언 리·클라크 게이블 주연 동명 영화(1939)로 유명한 그 '신여성' 얘기다.
빼어난 외모로 항상 자신만만하게 살았던 스칼릿은 격변의 삶만큼 감정의 변화도 다채로웠다. 10대 때는 탁월한 용모, 부유한 집안배경으로 인해 자신감이 넘쳤다. 미국 남북전쟁을 거쳐 지난한 삶을 살아갈 때는 애처롭다.
자신을 사랑한 레드 버틀러와 결혼했으나 가정은 평탄치 않았고, 아이마저 잃을 때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영예와 부를 누릴 때 살던 농장 '타라'를 재건하기 위해 그 유명한 마지막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를 외칠 때는 강인하다.
김지우 연기의 종합선물세트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든다. 하지만 그녀는 스칼릿의 심경 변화를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사랑하는 '애슐리'가 딴 여자랑 결혼한다고 자신 역시 다른 남자들과 두 번이나 결혼을 한다. 이해도 안 가고 답답함도 있었다. 근데 계속 접하다 보니 스칼릿이 너무 새로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당시 보기 힘든 신여성이었다. 천천히 성장해가면서 결국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한다."
'아가씨와 건달들' 이후 2년 만의 뮤지컬 복귀 무대다. 전 작품은 2013년 셰프 레이먼 킴(40)과 결혼 직후 출연한 작품이었다. 그 새 딸(1)도 얻었다. 스칼릿의 후반부와 겹쳐진다. "내 현실이 도움이 되더라. 남편과 아이로 인해 직접적으로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 시어머니가 이 작품을 워낙 좋아해서 응원도 많이 해준다."
동시에 걱정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칼릿은 주변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강인하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외친다. 잠깐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지'라는 생각도 했다. 근데 그건 스칼릿의 생각이 아니라 나 김지우의 생각이더라"고 털어놓았다.
"예를 들어 우리 할머니 세대 때는 자식들을 많이 낳았다. 그런데 당시 아이들이 아파서 죽는 경우가 지금보다 많았다. 아픔이 있고, 두려움이 있지만 더 어려웠던 그 때는 산 사람을 건사해야 하는 책임감이 있었다. 물론 스칼릿 자체도 냉정함을 가지고 있다. 그런 배경과 스칼릿을 좀 이해하면서 공부를 해나가고 있다."
스칼릿과 닮은 구석도 있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렸을 때 자신감에 차 있던 점"이라고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그런데 활동을 하고 나이가 들수록 그게 아니라는 사실에 허탈감과 자괴감이 들더라. 자신감을 잃어갔다"고 고백했다. "아이를 낳고 나도 모르게 숨겨진 강인함이 드러날 때, 스칼릿의 타라에 대한 집념과 비슷함"도 느낀다. "스칼릿과 접점을 찾은 뒤 김지우가 만들어내고 해낼 수 있는 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자세다.
예전에 책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먼저 접한 뒤 최근에서야 영화를 봤다는 김지우는 올해 초 이 작품과 또 다른 인연을 맺기도 했다. 뮤지컬배우 성두섭과 함께 EBS FM 라디오에 출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약 10일 간 낭독한 것이다. "그 때 1인9역을 맡아 연기한 점이 도움이 많이 된다"고 긍정했다. 그녀의 옆에는 상하 2권으로 나눠진 투툼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원작 소설이 놓여 있었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4시간인데 반해 뮤지컬은 2시간40분(인터미션 20분 포함)이다. 압축되면서 드라마의 비약이 생길 위험도 있다. 올해 초 한국 초연 당시 지적됐던 점이기도 하다. '맘마미아', '브로드웨이 42번가' 등의 한진섭 연출이 새로 가세한 만큼 약점은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들은 버틀러가 스칼릿을 왜 그렇게 사랑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레드가 남부군에 합류하기 직전 스칼릿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나랑 참 닮았어'라고. 그 말이 이해를 돕는다. 두 사람은 당시에 천박해보일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웠다. 특히 스칼릿이 타라 농장을 구하기 위해 레드에게 돈을 빌리러 간 부분에서 결국 그가 돈을 빌려주지 않자 '확 교수형에 처해버려라'고 내뱉고 온다. 레드는 그녀가 여태 봐온 여자들과 다른 스타일인 것이다."
스칼릿은 현재 잣대를 들이대도 파격적이다. 단면만 보고 편견에 휩싸여 판단할 공산도 크다. 김지우도 "나 역시 스칼릿을 처음 바라볼 때는 편견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쁘게도 볼 수 있는 스칼릿에 정당성과 설득력을 부여하고 싶은 욕심이 크다. "'그래서 이랬구나라'는 생각을 들게끔 만들고 싶다"고 눈을 빛냈다.
아울러 자신도 신여성이고 싶다고 바랐다. "예전보다 상황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럼에도 나로 인해서 배우들, 나아가 여성들이 더 많이 활동할 수 있는 물꼬가 터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주변 눈치를 보게 되고, 변화하는 걸 느낀다"고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편견을 깨기 위한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상반기에 MBC TV '일밤'의 '미스터리 음악쇼-복면가왕'에 출연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가면을 쓰고 나와 가창력을 겨루는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에 대한 기존 편견을 없애준다. 김지우는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고 '아싸 파란나비'라는 예명을 사용해 자신의 가창력을 새삼 증명했다.
"가면을 쓰고 있으니 내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스칼릿 역을 앞둔 지금의 마음도 그렇다. 스칼릿은 김지우라면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내는 캐릭터다. 남편이 죽어 상을 치르는 중인데 어떻게 다른 남자의 춤 제안을 받아들을 수 있을까. 금기시되는 걸 당당히 깨나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대리만족을 하는 셈이다."
공연보다 더 많은 대중에게 노출된 TV로 더 알려진 만큼 뮤지컬배우로서 김지우에 대한 편견도 꽤 있다. 김지우는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라면서도 자신이 초반에 출연한 뮤지컬만 보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는 갑갑한 마음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다, '렌트' '닥터 지바고' '베르테르'에서 김지우는 당당한 뮤지컬배우였다.
"모든 분의 마음에 들 수 없다는 건 안다. 다만 '생각보다는 괜찮네'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웃음) 계속 한 단계 씩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한 과정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마 평생 기억될 작품 중 하나다. 폭 넓은 연령대를 연기해야 하는데다가 커다란 변화를 겪고 나서 처음 출연하는 만큼 마음가짐과 생각도 이전과 다르다."
11월17일부터 2016년 1월31일까지 잠실 샤롯데시어터. 뮤지컬의 오프닝과 엔딩에는 영화 주제곡인 '타라의 테마'가 삽입된다. 버틀러와 딸 보니의 새 넘버도 추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