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금은보화를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크게 달라집니다. 세월을 아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술이란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만이 아니라 진리에 어긋나고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온 것을 의미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찌하든 믿는 자들을 미혹해 사망에 빠뜨리고자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야 미혹당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되어 세상을 이길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으려면 무엇보다 쉬지 말고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기름에 비유한다면, 기도는 영혼의 등불에 기름을 공급해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게 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찬미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세상에 물들지
성경 에베소서 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고, 이어서 5:10을 보면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말씀합니다. 이는 곧 빛의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됐던 성경상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삶 자체가 빛의 열매 곧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화평함을 좇아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가 하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취하지 않으려는 깨끗하고 착한 마음의 소유자였지요. 그는 선한 마음뿐만 아니라 의로운 행함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명하시자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대로 순종했지요. 또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 말씀을 의심 없이 믿은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로움이 되었습니다(창 15:6). 즉 자신이나 아내가 이미 출산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시자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합니다. 보통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상대에게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심한 경우에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하면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며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으로 이어져 다툼이 생깁니다. 잠언 13:10에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했으며, 디모데후서 2:23에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말씀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지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양심이 다르고 지식도 다릅니다.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우며 체험한 것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 중에는 오류도 많고 스스로 엉뚱하게 입력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심리학자 에빙하우스는 실험 결과, 사람은 하루가 지나면 기억의 70%를, 한 달이 지나면 80%를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보고 들어도 기억이 전혀 없거나 흐릿하게 남는 것이 있는 반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확실하게 떠오르고 잊히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는 기억 장치에 내용을 입력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무심코 흘려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고 듣기는 했지만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갈 때 창밖으로 누렇게 곡식이 익어가는 논과 밭이 보입니다. 이때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으면 고향에 도착했을 때 막상 무엇을 보았는지 별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또 학생이 수업 시간에 오락 등 잡념에 빠져 있었다면 수업이 끝난 후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요. 둘째로, 담아둔 것이 있습니다. 창밖에 펼쳐진 논밭을 볼 때 부모님과 연관하여 기억해 놓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농사짓는 모습 등을 떠올리며 논과 밭을 보았다면 어느 정도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또 학생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가볍게 담아두기만 하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사망의 길로 가던 사람에게는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질서를, 다툼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주시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선하고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으로 행복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 빛의 자녀로 거듭나면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과연 빛의 열매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풍성히 맺을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착함이란, 선하고 악의가 없는 아름다운 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병든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고 선을 베푸는 것,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뿐만 아니라 실례를 범치 않는 마음, 남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 화평하고 양보하는 마음, 욕심이 없는 마음, 자랑하거나 들레지 않는 마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 등이 다 착함에 속하
천국 새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열한 번째 기초석은 청옥입니다. 청색을 띠는 투명한 보석으로 이것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청결함과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청결은 마음에 죄가 없는 상태입니다. 어떤 흠과 티도 없는 깨끗한 마음을 청결하다 하십니다. 몸은 물로 씻으면 깨끗해지는데, 마음은 어떻게 해야 청결해질까요? 마음도 물로 씻으면 됩니다. 곧 영적인 물, 하나님 말씀으로 씻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22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만큼 깨끗한 참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버리라, 하지 말라’ 하신 대로 순종하면 점점 마음에서 비진리와 악이 씻겨 나갑니다. 또한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면 죄악에 다시 물들지 않고 계속해서 맑은 물을 공급받아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8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한 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단지 대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고 크신지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의 일생을 예로 들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이 선과 사랑 자체이심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축복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연단이 닥쳐올 때도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던 소년 시절에 장차 왕이 될 사람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 후 다윗은 승승장구만 했을까요? 그 과정에서 다윗이 가장 먼저 직면한 현실은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타국과 광야를 떠도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미친 척하기도 했고, 나발 같은 무례한 이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블레셋으로부터 구해 주었던 그일라 거민들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동고동락하던 부하들이 돌을 들어 자신을 쳐 죽이려 하는 일도 당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연단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너무나 아름다운 찬송 시들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감사하며 찬송하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결국 가장 좋은 것, 바로 이스라엘 온
천국 새 예루살렘 성곽의 아홉 번째 기초석은 담황옥입니다. 담황옥은 토파즈라 불리는 붉은 오렌지색의 투명한 보석입니다. 담황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양선’입니다. 양선의 사전적 의미는 ‘어질고 착함’인데, 영적 의미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세상에서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은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서 시대나 나라,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양선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진리인 하나님 말씀만이 변함없는 기준입니다. ‘자기 보기에 선’을 추구하는 마음은 영적 양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과 이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영적 양선입니다. 양선이 임한 사람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마 12:35).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선한 말과 행실이 나오지요.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양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만 선을 추구하는 것은 양선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선한 말과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주변에 덕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양선입니다. 어
천국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여덟 번째 기초석은 녹옥입니다. 녹옥은 파란색 혹은 연한 청록색의 보석으로 바다의 물빛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녹옥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로 오래 참음이 나오고,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도 오래 참음이 나옵니다. 이들 오래 참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사랑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내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나 내게 오는 갖가지 시련에 대한 오래 참음, 곧 개인적 차원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반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진리 안에서의 참음을 말하며 매사에 하나님 앞에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성령의 열매에 속하는 오래 참음이 더 큰 범주의 개념으로, 개인적인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오래 참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녹옥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인 오래 참음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 한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실행하며 변함이 없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받았다면 그것
천국 새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일곱째 기초석은 황옥입니다. ‘크리솔라이트(귀감람석)’라 불리며 올리브빛을 내는 올리빈(감람석)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천국 보석은 이 땅의 보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찬란한 빛을 냅니다.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영안으로 본 천국 보석과 가장 닮은 보석의 이름을 기록했지요. 천국 보석의 이름이 따로 있지만 그 이름을 기록한다면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나마 닮은 이 땅의 보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황옥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자비’를 뜻하며 도저히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진리 안에서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선으로 이해하고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자비의 마음을 이룬 사람은 편견이 없기 때문에 ‘누구는 이래서 좋고, 누구는 저래서 싫다.’ 하지 않습니다. 걸리거나 불편한 사람이 없으며 원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름답고 좋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해도 긍휼히 대해 줍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으며 도리어 이해하고 포근히 감싸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
홍보석은 진한 붉은빛의 투명하고 맑은 보석입니다. 이는 천국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여섯째 기초석이며 영적으로는 열심과 정성,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한 ‘열정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명을 뜨겁게 감당하며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지요. 사랑에도 차원이 있어 크게 영적 사랑과 육적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적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변함이 없지만 육적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에 쉽게 변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아무리 숭고해 보여도 영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사랑은 오직 진리 안에 들어와야만 이루어지는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 들어왔다 해서 곧바로 영적 사랑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영적 사랑의 정의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래 참을 수는 있지만 자기 이익을 구한다거나, 성내지는 않지만 무례하다거나 이렇게 사랑의 기준에 비추어 한 가지라도 걸리는 것이 있다면 아직 영적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영적 사랑을 하는 것 같은데도 여전히 외로움이나 허전함이 틈탄다면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받
천국 새 예루살렘 성곽의 넷째 기초석인 녹보석은 일명 ‘에메랄드’라고 불리는 초록색 보석입니다. 녹보석은 영적으로 ‘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에베소서 5:9에 나오는 ‘빛의 열매’의 빛깔과 같지요. 곧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함께 어우러진 빛깔이 바로 녹보석의 영적 빛깔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움이란 죄를 버리고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반듯하고 절도 있는 행함,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것, 옳은 일에 대해 뜻을 굽히지 않는 것 등이 다 의로움에 속하지요. 아무리 온유하고 착해도 의롭지 못하면 빛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아무 잘못 없이 멱살을 잡힌 채로 심한 모욕을 당하는데 바라만 보고 있다면 참된 의라 할 수 없습니다. 의가 없는 선은 하나님 편에서 인정하는 영적인 선이 아닙니다. 비굴하거나 우유부단한 것이 어찌 선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선이 없는 의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의가 아니라 자기 보기에 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함이란 거짓되지 않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어떤
고넬료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 군대인 이달리야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행함을 기뻐하시고 천사를 시켜 베드로가 머문 곳을 알려 주며, 그를 부르게 하셨지요. 베드로에게도 환상과 성령의 음성으로써 고넬료의 초청을 허락하고 그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와 보니, 그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까지 모아 놓고 사모함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자 성령이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임해 고넬료뿐만 아니라, 그의 일가와 함께한 친구들까지도 구원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넬료 가정이 축복받은 이유는 그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가족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신뢰받는 가장이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러기에 온 가족이 그에게 순종하고 하나 될 수 있었으며,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니 가족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녀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줘도 자녀가 그에 응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녀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자녀의 거울인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