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합니다. 보통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상대에게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심한 경우에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하면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며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으로 이어져 다툼이 생깁니다. 잠언 13:10에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했으며, 디모데후서 2:23에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말씀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지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양심이 다르고 지식도 다릅니다.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우며 체험한 것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 중에는 오류도 많고 스스로 엉뚱하게 입력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지면 자신만의 ‘의’와 ‘틀’이 형성됩니다.
의란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이 굳어지면서 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격이 틀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하나의 틀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몸으로 치면 틀은 골격과 같아서 자기만의 모습을 만들 뿐 아니라 일단 형성되면 깨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도 대개 의와 틀에서 나옵니다. 자격지심이 많은 사람은 상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또 부자가 옷깃만 여며도 옷 자랑한다 생각하고 누가 어려운 문자만 써도 자기를 무시한다고 느끼지요.
초등학교 시절, 저는 선생님에게서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나라를 지도까지 펼쳐 가며 배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후 1990년대 초반 연합성회 인도차 미국에 갔을 때였습니다. 뉴욕에 가니 자유의 여신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어야 할 것이 왜 뉴욕에 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물어 보니 자유의 여신상은 원래 뉴욕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철석같이 믿고 있던 지식이 틀렸다는 것을 안 순간, 내가 옳다고 굳게 믿는 것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 중에는 옳지 않은 것이 많지요.
교만하면 자신이 틀려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하다가 변론으로 이어집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의 확신이 있다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설령 어린아이라 해도 그 마음을 배려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셨으니(약 4:6)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 13:4) 글: 만민중앙교회 당회장, GCN 방송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