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 메말랐나요?”
정신지체장애인들의 아버지 임마누엘의 집 김경식 목사
“아빠,
다녀오셨어요?”
여느 집처럼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는 40대 후반의 가장을 향해 아이들이 꾸벅 인사를 한다. 아이들은 사실 아이가 아니다. 10대서부터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은 50∼60대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40대 후반의 이 남자에겐 엄연한 자식이다.
‘임마누엘의 집’ 원장 김경식(48) 목사. 그의 슬하에는 10명의 자식들을 키웠다는 흥부의 20배 가량 되는 자식들이 즐비하다. 이 많은
가족을 먹여 살리려 이리저리 뛰어 다니느라 목발을 쥐는 두 손은 굳은살이 더께더께 눌어붙어 솥뚜껑만 하다.
볼펜팔이, 기독서적·달력 외판원까지 해
200명 가까운 자식들은 전부 정신지체장애인들이다. 이 곳 임마누엘의 집에 60여 명, 강원도 인제 ‘애향원’에 100여 명, 경기도 성남
‘희망의 집’에 30여 명이 있다. 임마누엘의 집에서 정신지체장애인들을 수용하고 보살피기에는 턱없이 장소가 좁아 애향원과 희망의 집까지
짓게 됐다.
김 목사가 장애인복지사업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83년. 그는 도봉산에 조그맣고 허술한 집을 임대해 오갈 데 없는 장애인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했다. 그 자신이 세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인으로서 갖은 멸시와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아픔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자신보다 더 못한 장애인들을 보듬어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지금보다 더 좋지 않았다.
“장애인을 보면 ‘재수없다’며 소금을 뿌리기도 했어요. 저는 볼펜장사를 해서 살림을 꾸려갔는데, 볼펜을 사달라고 하면 볼펜을 사지는 않고
100원짜리를 구걸하는 거지에게 주듯이 던지고는 빨리 가라고 할 정도였죠.”
그는 그 후 기독서적·달력 외판원 등을 하며 악착같이 장애인들의 뒷바라지할 돈을 모았다. 무거운 책과 달력이 든 가방을 짊어지고 곡예를
하듯 목발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니 두 손은 물집이 잡히고, 짓물러 터져 피가 나기 일쑤였다.
그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쉼 없는 장애인복지를 위한 외길 10년만인 1993년 드디어 송파구 거여동
지금의 임마누엘의 집을 건립하게 되면서 보다 많은 정신지체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됐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벽을 허물기 위해
김 목사는 그의 자식들이 비장애인들과 충분히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자식들의 재활을 돕는 한편, 사회적응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임마누엘의 집에서 운영되는 모든 프로그램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호작업장은 직업재활을 돕기 위한 것이다.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할 수 없는 정신지체장애인의 특성상 이곳에서 종이백접기를 한다. 종이백은
한 장에 6원. 중증정신지체장애인과 중복(신체와 정신지체)장애인을 제외한 40여 명이 하루 종일 일해봐야 고작 4∼5만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돈벌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거죠. 한 달 해봐야 100만원 정도 되는데, 그 돈 전부를 자식들에게
돌려줘요. 일을 잘 한 사람은 3만원, 그보다 못한 사람은 2만 5천원, 장난을 치면서 일을 안 한 사람은 2만원씩. 한마디로 월급인 셈이죠.
그러면 그들이 용돈도 하고, 성금도 내고, 선생님들과 함께 군것질 회식도 하죠.”
보호작업장에서 일을 할 수 없는 중증과 중복장애인들은 의료재활과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특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풍물반, 볼링반, 등산반,
성가대 등을 운영하며 비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도전하고 있다. 하나 더, 신앙생활은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되고 있다.
그룹홈은 사회적응훈련을 시키기 위해 창안한 방법이다. 김 목사는 주택가에 빌라 2층(28평)을 전세 내 그의 자식 예닐곱 명을 독립시켰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반인들과 동등한 지역주민으로 생활한다.
처음에는 자기 집 주변에 장애인들이 들어와 산다고 싫어했던 주민들이 이제는 오히려 고마워 한다. 그의 자식들이 계단청소며, 집 주변 청소를
워낙 깨끗이 해 마을이 청결해진 데다 항상 밝은 표정을 지으며 살갑게 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주변에 살면 집값도 떨어지고 자녀교육에도 좋지 않다고 꺼렸던 사람들이 우리 자식들이 생활하는 걸 보고 위안과 새 힘을 얻는다고
해요. 같은 빌라에 사는 30대 중반쯤 되는 젊은이가 ‘처음에는 이사를 잘 못 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좋은 이웃이 있다는 것에 감격한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해오기도 했어요.”
후원 줄어 너무도 고민
요즘 김 목사는 시름이 가득하다. 후원금이 예년의 30%도 안 되기 때문이다.
“후원을 해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산층 이하였거든요. 그런데 경제가 안 좋아 그들이 무너지는 바람에 후원의 발길이 뚝 끊겼어요. 부자들은
1회성 후원으로 끝나요. 정이 메말랐나요? 올해는 그 마저도 소식이 없네요.”
자원봉사를 희망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 이중고를 겪고 있다.
“중증과 중복장애인들을 목욕시키고, 나들이 할 때 휠체어를 밀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턱없이 모자라요. 그전에는 자원봉사자가 많아서 그런
걱정은 없었는데….”
후원금이 줄다보니 ‘가족’들의 식탁도 달라졌다. 정부의 지원금으로는 맛있는 밥과 반찬을 해줄 수가 없다. 정부가 1인당 식비조로 지원해주는
금액은 하루 2,700원. 부식비가 1,600원, 주식비가 1,100원이다. 그 돈으로 그 흔한 고깃점을 반찬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복지예산이 많이 인상은 됐지만 식비지원금은 최저극빈자 수준도 안 되요.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고기를 먹이려고 노력해요. 하지만
고깃국이라고 끓여보면 한강의 물고기처럼 거의 보이지 않아요.”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가족들’과 소박하게 삼겹살 파티라도 하며 즐겁고 배부른 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김 목사의 마지막 꿈은 장애 노인을 위한 실버타운을 짓는 것과 전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양로원은 많지만 장애인 양로원이 없어요. 장애인들은 일반 양로원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장애인 노인을 위한 실버타운을 짓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 전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동옥 기자 aeiou@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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