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폐환자가 죽어가고 있다
죽음을 강요하는 진폐정책
광산 노동자들에게서
주로 발생하는 진폐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직업병이고 완치가 불가능한 만성질환이다. 광산 사업장과 광산 노동자들이 급격히 줄었지만 진폐환자는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이 미온적이란 게 진폐환자들과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확산되는 진폐
진폐증은 단일직업병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산업재해 관련 질병이다. 1985년 진폐법 시행된 이후 2001년 7월까지 6,672명이 진폐증으로
사망했다.
특히 1989년부터 석탄산업 합리화에 따라 탄광 수가 360여개에서 10개로, 탄광 노동자는 6만8천여명에서 7천명 미만으로 대폭 격감했지만,
진폐환자는 98년 325명, 99년 455명, 2000년 443명, 지난해 565명이 증가하는 등 최근까지 급증세를 타고 있다.
탄광 수와 탄광 노동자가 대폭 감소했지만 진폐환자가 크게 늘어난 데에는 진폐 재해자에 대한 열악한 의료서비스가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과거
광산에서 근무했던 잠재적 진폐 재해자들이 노세해 짐에 따라 병의 정도가 깊어진 것도 증가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젠 진폐증이 단지 탄광노동자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주물공장에 근무하는 다수의 노동자들에게서 진폐증이 확산되고 있으며, 조선소에서
용접일을 하는 노동자들도 용접할 때 발생하는 미세한 철가루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는 6만1천여명의 진폐 재해자가 탄광촌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으며, 이 가운데 5.2%에 불과한 3200여명만 진폐 요양을 받고
있다. 재해자 수에 비해 병원요양 환자 수가 턱없이 적은 것은 요양대상자로 선정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진폐증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해야 요양대상자로 선정될 수 있고, 합병증의 항목도 한정돼 있어 환자들은 “죽을 때 되서야 병원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진폐증만으로 요양 불가
이같은 절차에 대해 정부측 관계자는 “진폐증은 현재 의학기술로 치료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진폐증만 가지고는 요양대상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치료할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에게는 요양대상자격을 줄 수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병원에 입원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입원 환자들은 평균 임금 70%의 휴업급여로 받게 되고, 치료비는 국가에서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요양하지 못하고 집에 치료해야하는 재가 진폐환자들은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고통을 동시에 겪을 수밖에 없다. 진폐증 환자들의 경제활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장애인 판정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세민 혜택도 없어 재가 진폐환자의 경우 대부분이 경제적 파탄을 맞고
있다. 특히 이들은 현재 진폐증으로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관, 불만 등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재가진폐
환자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보호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임영 여의도성모병원 산업의학과장은 “정부 담당자들은 20년 안에 사라질 병이라며 진폐문제에 대해 안이하게 대응한다”며 “분명 20년 안에
사라질 수도 있으나 그 기간동안의 피해가 얼마나 클 지를 생각하지 못 한다”고 담당기관의 행태를 꼬집었다.
”주먹구구식 진폐정책 버려야”
한국노동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진폐재해자들은 대부분 1940~1950년대부터 광산에 취직해 약 30~40여년 동안 열악한 조동조건 속에서
높은 강도의 노동을 감수해왔지만 낮은 임금으로 인해 빈곤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 했다.
또한 이들은 광산노동의 후유증과 노인성 장애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대부분 자녀들이 부양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무런 보살핌
없이 방치되고 있다.
관계전문가들은 “진폐문제는 일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진폐문제는 산업재해와 빈곤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하고 노사관계와 사회정책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사실 진폐환자는 단순한 산재근로자이기보다는 노인, 빈민, 장애인의
특성을 고루 가지고 있는 사회적 취약집단이다.
또 진패증의 책임은 빈곤했던 광산근로자 개인에게 있기보다 1960~70년대 개발독재를 기반으로 한 착취적 노사관계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따라서 진폐문제는 직업병문제, 노인문제, 빈곤문제, 더 나아가 가족문제 등의 영역에 걸쳐 있는 사회정책의 문제다.
임영 과장은 “진폐환자는 사회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며 “하지만 정부 주요부처는 자기 관할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른 척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수십 년 주먹구구식으로 지속된 진폐정책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자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고병현 기자 sama1000@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