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곡수매가 인하 쌀 개방 수순인가?
쌀 산업적측면보다 다원적 기능고려 해야
재고물량 실질적 처리 방안 필요
WTO 쌀 개방을 위한 DDA(도하개발어젠다)협상이 본격 시작됐다. 지난달 22일부터
24일까지 스이스 제네바에서 열린 농업위원회는 그 시작을 알린 것. 전문가들은 오는 9월 5차 WTO각료회의에서 쌀개방에 관한 최종 합의가
도출될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때문에 올해는 한국 농업의 미래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해다. 정부와 농민단체, 그리고 노무현 당선자측 역시 DDA협상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 비근한 예로 지난달 24일 대통령직 인수위의 농어민대책 관련 국정보고 토론회에서 노 당선자가 농림부의 미온적인 대책을 크게 질책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자리에서 노 당선자는 “농민은 빚더미에 허덕이는데 공무원 가운데 어느 한사람 책임지는 일이 없다”며 “농림부 공무원들은
앞으로 사표 쓸 각오로 쌀 문제를 비롯한 농업문제에 대처하라”고 호통을 쳤다고 측근은 전했다.
최초 추곡수매가 인하
정부가 48년 전 쌀 수매제도를 실시한 이후 처음으로 추곡수매가를 2% 인하하겠다고 결정해 정부가 쌀의 구매자가 되어 가격을 지지하는 정책을
사실상 포기했다. 농민단체들은 수매가 인하가 논농업을 말살하려는 정책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고 내년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도 반대 입장을
표명해 정부안의 국회통과는 미지수다.
농림부는 4일 국무회의를 열어 2003년산 추곡수매가 2%인하 방침을 확정짓고 소득감소를 보전하기 위해 논농업직불금을 800억 증액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부의 추곡수매가 인하방침에 대해 전농과 한농연 등 농민단체 연석회의는 성명을 발표해 “추곡수매가 2% 인하 안 즉각 철회”와 “농민에
대한 특단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아울러 이들 단체들은 정부가 2%인하 방침에 대한 대책으로 발표한 논농업직불금 800억 증액에 대해 “논농업직불제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에
대한 보상 차원”이라며 “농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소득을 보전하는 것처럼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농의 박흥식 사무총장은
“현재 논농업직불 자금이 4천억 원 정도가 있고, 이번에 800억원을 증액한다고 하는데 이번 자금은 논농업직불 자금이 아니라 쌀소득보전금이라고
봐야한다”며 “쌀소득 보전금 800억원은 말그대로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농민단체들은 성명에서 “정부가 생산조정제 등 쌀 포기정책에 이어 추곡수매가 마저 인하하겠다는 것은 쌀 재협상시 쌀을 포기하기 위한 구실”이라며
“추곡수매가 인하는 농민들에게 쌀 농사짓기를 포기하고 죽으라는 선언과 다름없다”고 규탄했다.
그들은 또 “쌀은 농가소득의 절반을 차지하고 논농업에 종사하는 농가가 70%이상을 차지하는 농업의 주요기반”이라며 “쌀 소비확대 방안 마련”과
식량정책 수립 차원의 “대북 300만섬 지원 법제화”를 촉구했다.
그동안 농민 단체들은 태풍 등의 영향으로 작년 쌀생산량이 10%이상 감소해 1조원에 달하는 소득감소가 있었다며 “2003년 소비자 물가인상을
반영 최소 3% 인상”을 요구해 왔다.
쌀생산조정제 “농지 축소의도”
정부는 올해부터 ‘쌀 가격 경쟁력 제고’라는 명분으로 전국 논의 2.6%인 27500㏊에 달하는 농지를 대상으로 3년간 벼를 비롯한 기타
작물을 재배하지 않을 경우 1㏊당 300만원의 휴경보조금을 지급하는 ‘쌀생산조정제(논 휴경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농민단체들은 “노무현 당선자의 첫 농업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정책이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위한 대책이 아니라, 쌀 개방을
위한 수순”이라고 즉각 반박했다. 전농 박흥식 사무총장은 “이 정책이 시행되면 앞으로 많은 양의 농지가 훼손으로 이해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 이유로 “3년 동안 논을 휴경하게 되면 그 땅은 농지로써 가치가 떨어진다”며 휴경지에 “다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을 투자해야하는데 누가 농사를 지으려고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또 “쌀생산조정제를 시행하기에 앞서 쌀 생산량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재고처리의 방침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개방 충격 완화 불가피”
추곡수매가 인하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부가 수매가를 인하한 이유는 발등에 불 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중인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과 내년으로 다가온 세계무역기구(WTO) 쌀재협상 과정에서 국내 쌀시장의 추가개방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외국 쌀과 국내 쌀값 차이는 지난해 기준으로 4.9배이다. 정부는 또 올 연말 국내 쌀재고가 적정 재고의 2배 수준인 1190만섬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장기적 정책 왜 안되나?
9년전인 지난 94년 우루과이 협상이 타결되면서 쌀개방이 예고 됐음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농업분야의 경쟁력 확보
노력을 하기보다는 농민표를 의식해 미봉책만 내 놓다가 결국 개방을 코앞에 둔 지금에 와서 농민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오는 15일 서명될 자유무역협정(FTA) 상대국인 칠레의 경우 10여 년만에 농업 경쟁력을 국제적 수준으로 높였으며, 한국과 사정이 유사한
일본의 경우에도 쌀시장 개방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정부는 어떠한가? 주식인 쌀이 개방되는 대도 경각심을 같지 못했던 것이다.
개방인정한 정책이 무슨 정책
무엇보다도 농민단체들은 당장의 추곡가 인하보다 앞으로 개방확대로 외국산 쌀이 물밀듯이 수입되면서 국내 농가가 생존권 자체를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쌀정책은 내년에 시작되는 쌀재협상 과정에서 쌀에 대한 관세부과가 계속 유예될 수 있느냐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외국산 쌀은 국내소 비물량의 4%까지만 허용되고 있으며 그 이상은 수입이 원천적으 로 봉쇄돼 있다. 전세계적으로
쌀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수입 물량 을 제한하고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필리핀 2개국 뿐이다. 따라서 내년 WTO 쌀재협상 과정에서 관세화
결정이 내려질 경우에는 국내농가에 치명적인 타격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국내외 쌀 값차이가 4.9배에 달하는 상황에서 관세를 100~200%를
물린다고 해도 외국쌀이 국내 쌀보다 값이 훨씬 싸기 때문이다.
또한 칠레와의 자유무역이 성사되게 되면, WTO개방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범수 기자 skipio@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