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페놀사건은 12년 전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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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놀사건이 발생한 지도 만 12년을 맞는다. 1991년 3월 중순에 일어난 낙동강 페놀사건은 우리나라 환경오염 역사상 전국민의 분노를 가장
격렬하게 일으켰던 사건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페놀사건은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페놀피해임산부의 경우와 같이 이 순간에도 페놀로 인한 피해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이 페놀사건 진행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많은 의문들이 여전히 속 시원히 풀리지 않은 채 숙제로 남아 있다.
페놀사건의 전모
1991년 3월 14일 저녁 10시부터 15일 오전 6시까지 8시간 동안 구미공단내 두산전자에서 페놀원액 30톤이 불법 방류돼 낙동강 원수에
흘러들어 갔다. 방류된 페놀 폐수는 3월 16일경 대구시 경계에 위치한 낙동강 다사수원지에 유입됐다.
다사수원지에 유입된 페놀은 정수과정에서 사용하는 살균제인 염소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클로로페놀을 형성하였다. 클로로페놀은 페놀의 300~500배에
달하는 불쾌한 냄새를 발생하는 유독물질이다.
대구시는 3월 16일 오후 2시 30분경 시민의 제보로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원수·정수에 대한 수질 분석을 실시했고, 다음날 수질분석 결과
수돗물에 페놀이 함유돼 있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다사 수원지를 상수도로 하는 대구시의 남구, 달서구 전지역과 중구, 동구, 북구, 수성구 일부지역 42만 세대 162만 명(당시 대구시
인구의 71%)은 이미 페놀로 오염된 수돗물을 마심으로써 많은 피해를 발생시켰다.
당시 한 조사에 의하면 페놀로 오염된 상수도를 이용한 시민의 약 92%가 수돗물에서 특유한 악취를 느꼈고, 44%가 소화기증상 등 여러 가지
페놀과 관련한 증상을 호소했었다고 보고했다.
사상 최대의 피해
당시 대구지역 시민단체가 4월 30일까지 접수한 피해신고 건수는 모두 1,617건이었는데, 유형별로는 임산부 664건(유산 255건), 신체적
피해 205건, 물질적 피해 591건, 기타 157건으로 임산부 등 신체적 피해가 전체의 53.8%에 달했다.
페놀에 의하여 피해를 본 임산부들이 대구시 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피해 배상을 신청하였으나, 피해에 대한 인과관계의 증명이 어렵다는 이유로 기업의
사회적, 윤리적 책임의 차원에서 실비변상만이 인정됐다.
그 후 60명가량의 임산부들이 조정에 불복해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재정신청을 하였으나, 그 심사결과에서도 페놀오염과 임산부 피해의 인과관계를
인정되지 않았다.
1992년 말에 16명의 임산부들이 대구 지방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1993년 2월부터 지루하게 공판이 진행되었으나 사건당시
수돗물 중 페놀과 클로로페놀의 농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또한 이것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어서 재판부의
판결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다가 결국 재판부의 조정 결정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5개월 동안 실수로 방출(?)
개운치 않은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두산전자가 1990년 10월 21일부터 1991년 3월 20일까지 무려 5개월
동안 1일 평균 1.7톤의 페놀 폐수를 방류해 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검찰은 두산전자의 고의적인 페놀 방류를 밝혀 내지 못하고 하급직원에 한정해 형사 책임을 묻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했다. 검찰은 결국 사건의
원인과 책임추궁을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다.
사건 초기에 검찰은 두산이 비밀배출구를 통해 고의로 페놀을 방류했다는 강한 혐의점을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초기의 강경한 검찰수사는
시간이 갈수록 느슨해졌고 결국 그것이 비밀배출구가 아니라고 두산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또한 두산은 당시 소각기 2기중 1기가 90년 10월경부터 계속 고장이 나 있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였을 뿐 아니라 소각로 1기로는 페놀 폐수를
처리할 수 없다는 점을 검찰 수사 결과 확인하였으면서도 고의성이 아닌 과실에 의한 누출이었다고 하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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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온적 대처가 부른 화
사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낙동강 페놀 사건과 관련해 “환경처장관과 대구시장을 문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그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는
공해기업에 대한 정부당국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정부는 두산전자가 조업정지 처분 취소 행정심판을 하자 아무런 고민없이 두산전자의 신청을 받아 들였다. 결국 두산전자는 조업정지 17일
만에 정상 가동되었다.
관련 기관과 정부의 관대한 처사 때문이었을까? 두산전자가 조업 해제후 14일 만에 또다시 페놀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2차 페놀사건으로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이 극에 달했다. 또한 정부는 산업폐수로 오염된 낙동강을 살리기 위해서 수조원의 자금을 쏟아 부었다.
12년이 지났지만 두산전자의 부도덕은 여전하다. 환경부가 지난해 4분기 중 총 4만 2,712개의 대기ㆍ수질 오염물질 배출업소를 단속한 결과,
두산전자 구미공장은 오염방지시설이 있음에도 이를 가동하지 않은 채 오염물질이 유출되다 적발돼 조업정지와 함께 고발 조치 당했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 두산그룹의 기업문화라면 한 노동자의 분신도 결국 잘못된 기업문화가 만들어낸 비극이
아니었나 싶다.
고병현 기자 sama1000@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