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키운 수배
…병원이 그리웠다
한총련 관련 정치수배자 공개 건강검진
…대부분 신체적·정신적 질환 앓아
7년만의
의사와 환자의 만남. 건강해서가 아니다. 그의 몸은 벌써 걸어다니는 종합병동 그 자체였다. ‘한총련 관련 정치수배해제를 위한 모임’ 유영업(수배7년·제5기
한총련의장권한대행) 대표는 수배자가 된 후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시력은 좌우 1.5/1.2에서 0.5/0.3으로 떨어졌고,
허리디스크가 생겼다. 위장도 말이 아니다. 두통은 한시도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비단 그만 이런 것이 아니다.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7년 동안 수배상태인 학생들은 저마다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의사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조차도
공안당국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병력 투입될라 조마조마
3월9일 오후1시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소강당. 정치수배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혹시 붙들려 갈까 마음을 졸이며 수십명의 학생들 틈에
몰래 끼어 외대 정문을 넘고 무사히 입성(?)한 인원이 50여명. ‘한총련 관련 정치수배자 공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날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등 보건의료단체연합 소속
의사와 한의사, 약사, 간호사 등 20여 의료인이 정치수배자들을 위해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학생 정치수배자들은 주로 각 대학 학생회관에서 작은 생활방을 마련해 잠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해 본 지는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한밤중에 눈치를 봐가며 찬물을 끄적거려 몸을 씻는다. 장기간의 수배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심근염, 시력상실, 이명증 등이 이들을 괴롭힌다. 신체적으로는 찬바닥에서 수면을 취하고 불규칙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해
허리디스크와 어깨결림, 생리불순, 위장병 등을 덤으로 얻었다.
유영업 대표는 “안양 한림대 성심병원에 다면적 인성검사 설문지를 접수시킨 상태”라면서 “이를 통해 정신적으로 억압받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대표는 또 “3월8일 광주전남지역을 시작으로 3월16일 부산경남지역까지 세 차례 공개건강검진을 실시해 조만간
결과발표를 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공개 검진장을 찾았던 권오헌 양심수 후원회장은 “정치수배자들이 집단적으로 공개검진을 받는 경우는 세계에서 최초일 것”이라면서 “이들이
무얼 잘못했다고 건강권까지 박탈하느냐”고 분개했다.
경인지역 공개검진이 있기 하루 전인 3월8일 광주전남지역에서는 경찰병력 500여명이 검진장을 봉쇄해 자칫 공개검진 자체가 무산될 뻔했다.
주최측은 어쩔 수 없이 장소를 광주YMCA 무진관에서 조선대학교 강의실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3월9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공개검진이
진행될 당시에도 청량리 경찰서측은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해 언제라도 경찰병력을 투입하겠다고 주최측에 통보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경찰병력은 투입되지는 않았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추운 곳에서 잠을 자는 탓에 어깨가 굳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항상 초긴장 상태다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체중이 대부분 수배
이전에 비해 줄었다. 몸과 기력이 젊은이들 같지 않다. 늙은 노인을 보는 듯 하다.”
청년한의사회 소속 조혁태 한의사가 진료 후 한 말이다. 박병준 한의사도 “대부분 몸상태가 말이 아니었다”면서 “불규칙한 식사와 스트레스로
인한 위장과 심장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아 침과 뜸, 부황, 첩약 등의 처방을 내렸다”고 말했다. 청년한의사회는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한
학생에 대해서는 학교 등으로 약을 보내줄 방침이다.
진료를 받은 학생들 중에는 심각한 상태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박제민(수배5년·2000년 경기대총학생회장) 씨는 지난해 11월에 다리가
부러졌으나 후속조치를 못 해 병을 키웠다. 박씨는 동료들의 부축을 받고서야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수 있었다. 그는 또 위벽이 헐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술 때문이 아니다. 정신적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 때문이다. 6개월째 설사도 멈추지 않고 있다. 정확한 검사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이외에도 박씨는 스트레스성 피부염과 지속적인 탈모가 진행되고 있다. 시력은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다. 안경을 쓰고서도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박씨는 “몇 번이나 병원에 가보고 싶었지만 체포의 위협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유영업 대표도 박씨와 같은 말을 했다. 유
대표는 허리디스크로 한창 고생을 하던 1999년, 한의원에 한 번 간 적이 있다. “한의사가 ‘밤에 무리하느냐?’고 묻길래 ‘그렇지 않다’고
했더니, ‘혹시 그럼 일반 학생신분이 아니지 않느냐?’며 쳐다보더라. 그래서 그 한의원은 물론 다른 곳도 갈 수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 김정범 씨는 “학생들에게 충분히 잠을 자고, 제 때 식사하며 규칙적인 생활리듬을 만들라고 충고하고 싶지만
이들에게 그런 충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면서 “수배해제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돼야 이들의 병도 치유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수배자 문제도 양심수 문제와 함께 논의돼야”
1997년에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된 이후 소속 대의원이라는 이유만으로 1,000여명이나 구속됐다. 한 해에만 400여명의 수배자가 양산되고,
현재 182명이 수배중이다.
권오헌 후원회장은 “이들을 잡아두는 국가보안법은 현실성이 없다”면서 “실형을 선고하는 비율이 2%가 채 안 된다”고 말했다. 권 후원회장은
“학생들을 학교에 격리시킨 후 집이나 병원에 가지 못하도록 막고, 심지어 부모가 사망해도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게 하는 학생 정치수배자
문제는 인권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영업 대표는 “양심수 사면 가능성이 높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정치수배자와 관련해서는 논의되고 있지 않다”면서 “정치수배자 문제도 논의에
포함시키고 반드시 수배해제 조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정치수배해제모임은 인터넷 사이트 다음(daum)에 ‘보이지 않는 창살(http://cafe.daum.net/nofree2003)’과
세이클럽(sayclub)에 인터넷 라디오 ‘새봄’을 개설하고 정치수배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일반에게 알리기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김동옥 기자 aeiou@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