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보험업법 개정인가?
보험소비자 외면, 보험사 이익 대변
월급을 손에 쥐기도 전에 빠져나가는 의무보험에서부터
건강과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계약하는 민간보험, 그리고 웹싸이트 가입만 해도 공짜로 들어주는 공짜보험까지 우리나라 국민들은 한두 개에서
많게는 십여 개의 보험에 가입돼 있다. 국민 한 사람이 지출하는 보험료도 지난해 이미 100만원을 넘어섰다. 대한민국은 가히 보험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4월 23일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25년 만에 법개정이 이루어졌다. 보험산업의 발달속도를 놓고 본다면 한참 뒤쳐진
개정이었다. 법의 뒤늦은 행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내용에 있다. 시민사회단체들과 보험소비자들은 “이번 개정이 보험사를 위한 개정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는 8월 1일부터 시행될 보험업법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밝혀 보았다.
정체불명의 제3보험
보험업법 개정을 위해 재정경제부가 최초 원안을 내놓은 것은 지난해 6월이다. 법의 통과하기까지 10개월여 동안 몇 차례의 공청회와 세미나를
통해 원안에 많은 손질이 가해졌다. 몇몇 조항이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조항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보험소비자보다
보험회사에게 유리한 형태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보험소비자들의 주장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제3보험의 등장이다. 최초 원안에 없던 제3보험은 최종 개정안에 포함돼 통과됐다. 개념도 분명치 않은 제3보험의 등장은
보험업법 개정 문제를 놓고 대립하던 생명보험업계와 손해보험업계의 빅딜로 생겨났다.
생명보험은 사람의 생존 또는 사망에 관해 일정한 급부를 제공해 놓고 보험료를 수수하는 정액보험, 즉 해당사항에 대해 계약시 정한 일정액을
지급한다. 실손보상에 비해 보상액이 많아 그동안 보험시장의 70%를 생보사가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손해보험은 우연한 사고로 인하여 발생하는
손해의 보상을 약속한 실손보상보험, 즉 손해액만큼만 보상한다. 보상금이 싼 만큼 보험료도 싸지만 가입기간에 제한이 있었다.
생보사와 손배사들의 빅딜로 만들어진 제3보험이란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해, 질병, 장기간병보험 등이다. 제3보험의
등장으로 생보와 손보의 벽이 허물어졌다. 생보사나 손배사 모두 제3보험을 취급할 수 있게 돼, 생보사들은 실손보상이 되는 상품을 취급할
수 있게 됐고, 손보사들도 15년으로 제한된 상품의 만기가 풀려 평생을 보장해주는 상품을 팔 수 있게 됐다. 제3보험은 생보와 손보의 벽을
허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제3보험의 등장은 소비자의 권익을 위해 생겨 났다기 보다 생보업계와 손배업계가 신규시장 진출을 위해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생보사와 손배사는 실손보상이 이루어지고 가입기간이 길어진 만큼 보험금이 낮아져 보험계약자들에게 이익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좀더 지켜볼 문제다.
보험소비자만 골탕
한편, 정액보험으로 보험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생보사가 이제는 실손보상 상품까지 팔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과연 보험소비자들에게
이득이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려가 더 높다.
보험소비자협회 김미숙 사무국장은 “생보사의 실손보상 상품판매는 기존 ‘건강보험 상품’의 해약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짙으며 이로 인한 보험소비자들의
피해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정액보험에 대한 보상이 명확하지 않아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실손 보상 상품 판매에 따른
‘보상’이 기존 판매된 상품까지도 소급 적용될 가능성도 높다”고 주장했다.
일례로 김상근(가명) 씨는 2001년 6월 26일 버스교통사고를 당해 사고 당일부터 9월 29일까지 14주(89일)동안 입원해 있었다.
버스공제조합은 치료비를 병원에 지급처리한 반면 김 씨가 계약한 D보험사는 보험금 청구 2달 만인 2001년 12얼 17일 8주에 해당되는
보험금을 김 씨 통장에 입금했다. D생보사는 “환자의 요추부염좌에 대한 적정 입원기간은 통상적으로 3~4주이며 적극적 치료를 하였어도 회복되지
않는 경우에는 추가로 3~4주 입원할 수 있다”는 이유로 8주에 해당하는 입원보험금을 지급했다. 김 씨의 입원은 환자를 직접 치료한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버스공제조합도 의사의 진단서를 인정하고 치료비를 지급했으나 ‘정액보험’을 판매한 생명보험회사는 오히려 보험금을
삭감해 지급했다. 김씨가 나머지 입원보험금을 받기 위해서는 민사소송을 하는 수밖에 없다.
‘정액보험’은 보험사고가 정상적으로 발생하고 치료를 받은 의사진단서를 첨부하면 그 사유가 타당할 경우에는 ‘보험금 전액’을,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보험금 지급을 아예 거절하고 보험계약을 해지하면 된다.
그러나 생보사들은 김상근 씨의 사례처럼 보험계약을 계속 유지하게 한 채 보험금은 삭감 지급하는 등 ‘불법행위’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K 생보사의 경우 재해 1급 장애 발생시 15억1,000만원에 이르는 보험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하고 보험료를 받았으나, 실제 계약자가 1급
장애를 입어 서울대학병원 진단서까지 첨부해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생보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2년 동안 보험금 삭감 지급을 주장해 오다가
2억5,000만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강제합의서’를 작성케 했다. K생보사가 지급한 2억5,000만원의 보험금은 명확한 책정근거도 없는
합의금이었다.
생보사들은 ‘정액보험’만을 판매하고 보험사고 발생시 ‘의사진단서’에 의해 약정한 보험금을 보상해 줘야 하지만 수십만 건에 이르는 정액보험이
위의 경우처럼 합의금으로 처리되고 있는 실정이다.
개정이 아닌 개악
보험사가 정액을 보상하지 않을 경우 보험소비자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소송밖에 없다. 하지만 개인 대 기업간의 법정싸움에서 보험소비자가
불리한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따라서 최종까지 가면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 낼 수 있지만 소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보험소비자들은 손해를 보면서
합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를 방지하지하고, 보험계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최초 개정안에서는 ‘법원이 결정하는 통상적인 보험금보다 현저하게 낮은 보험금을 지급액으로
제시하는 행위’를 금했지만 최종 통과안에는 위의 조항이 삭제되었다. 쉽게 말하면 법원이 100만원의 보험보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할 것에
대해 보험사가 보험계약자와 40~50만원에 합의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편 개정안 ‘제9장 관계자에 대한 조사’에서 “건전한 보험거래질서의 확립을 위해 필용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보험계약자, 피보험자, 보험금을
취득할 자 또는 그 밖에 보험계약에 관하여 이해관계가 있는 자에 대한 조사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최초에는 ‘보험회사’도 포함돼
있었으나 삭제되었다.
위 조항은 보험회사가 개념도 불명확한 ‘보험사기’에 대한 방비책으로 개정안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보험사들은 “보험관련 범죄가 2001년도
148건, 2002년 88건이 발생했다”며 조사권 강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2001년도 보험사에 제기된 민원중 처리된 것만 3330건.
수치상으로 본다면 보험회사에 대한 조사권이 더욱 강화되어야 하지만 최종 개정안에서 보험회사에 대한 조사는 삭제되었다.
이외에도 부당한 계약 전환에 대한 처벌규정이 약화되었다. 예전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었으나 개정안은 5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보험소비자의 피해를 막기보다 부당한 영업행위를 독려하는 꼴이다.
김 사무국장은 “이번 보험업법 개정은 보험소비자의 권익은 착취하고, 보험회사 이익만을 위한 것”이라며 “보험업법이 아니라 보험회사법”이라고
비난했다.
김헌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운영위원도 보험업법 개정 공청회에서 “보험업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현재의 개정안은 보험계약자의
권익보호, 사금고화 방지, 보험사업자의 재무안정정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매우 미흡하므로 대폭 수정ㆍ보완ㆍ추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고병현 기자 sama1000@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