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 ‘주연’ 선언, 시민사회 정치세력화
정대화 교수 “시민운동과 시민정치 양립해야”
내년
17대 총선은 그 어느 때 선거보다 변화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공천권과 선거자금을 쥐고 당을 좌지우지했던 제왕적 총재 정치가 3김 시대
종식과 함께 사라지고, 상향식 공천 등 선거 시스템이 민주화되면서 도덕성과 전문성을 갖춘 신선한 인물들이 대거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시민운동가들의
정치 입문도 17대 총선을 통해 폭넓게 시도될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운동 내부에서는 참여정부 출범 초기부터 시민사회의 정치세력화 적기로
예상한 바 있다. 내년 선거의 관심사항 중의 하나는 정치세력화를 선포한 이들 시민사회의 활약상이다.
개혁신당추진연대회의 39명 총선 출사표
현재 민주당 탈당파 의원 모임인 국민참여개혁신당과 신당 창당을 조율중인 개혁신당추진연대회의를 통해 총선 출마 의사를 밝힌 시민운동가는 모두
39명<표참조>이다.
이들은 정치권이 국민의 정치개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 시민사회가 새로운 개혁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시대적 대세로 정치진입을
시도한다고 말한다.
출마 인사 중 눈에 띄는 인사로는 호주제폐지를위한시민모임의 고은광순 대표다. 그는 출마의 변을 통해 “정치적 소양을 갖춘 인물만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변화 욕구를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여성정치세력화를 위해 해야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000인 선언 “국민 정치 참여 기반 닦을 것”
시민사회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나선 또 하나의 그룹은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주체 형성을 촉구하는 시민사회 1000인 선언’(1000인 선언)이다.
환경운동연합 최열 공동대표와 여성단체연합 이오경숙 상임대표, 상지대 정대화 교수 등 시민단체와 여성·학술·법조·종교 등 각계 인사로 구성된
1000인 선언은 지난달 8일 기자회견을 통해 “시민사회가 새로운 정치주체로서 정치개혁의 전면에 나설 것”을 천명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정치가 정치기득권 집단의 독점물로 남아 구태가 반복되는 바람에 시민들이 냉소주의와 무관심에 매몰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낡은 정치를 대체할 새 정치는 새로운 정치주체에 의해 이뤄져야 하며, 새 정치주체는 시민사회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시민단체 재야 대표 15명으로 구성된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주체 형성을 위한 기획단’을 발족, 지방 순회 토론회 등을 통해 지역의
민심을 듣고, 향후 방향을 설정할 계획이다.
1000인 선언에 참여한 정대화(상지대)교수는 “당초 이달 초부터 지역을 돌며 여론을 수렴할 계획이었지만, 일정이 다소 늦춰져 이 달 중순부터
대전, 호남권, 영남권, 수도권을 중심으로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시민사회 정치세력화 담론
시민사회 정치세력화 표명을 두고 정치권은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1000인 선언과 관련해 한나라당은 논평을 내고 “순수성이 생명인 시민단체는
현실 정치참여에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논평에서 한나라당은 “80년대 후반부터 시민단체가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지난 2000년 총선과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큰 기여에도 불구하고 적법성과 공성정 측면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비판했다.
특히 논평은 “시민단체의 정치참여는 성숙돼온 시민사회를 10년 후퇴시킬 것”이라는 모 학자의 지적을 인용하면서,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가
“시민단체 역할의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이 크다”고 지적했다.
자민련 역시 대변인 논평을 통해 “시민단체를 정치세력화함으로써 시민단체로의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치권은 반응에 대해 이오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기존 정치 세력들이 잘했다면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고
비판하고, “시민단체 일부 인사들이 정치세력화에 나서더라도, 시민단체들은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사회의 정치세력화에 대해 시민사회단체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이 선언에서 빠진 이유도 바로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고계현 경실련 정책실장은 “시민단체의 비영리성과
비당파성은 국민 신뢰와 사회적 설득력의 기반이 되어 왔다”며 “이 같은 원칙을 폐기하고 세력화를 시도한다면 시민운동에 타격을 가져올 것”이라고
밝혔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도 “정치세력화 논의 자체는 가능하지만 권력감시단체는 정치참여에 신중해야 한다”며 “이번 총선에서 참여연대는
‘정치개혁운동’에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활동가가 바라본 시민사회 정치세력화
지난 9월25일 목포에서 열린 2003전국시민운동가대회에서도 시민사회 정치세력화에 대한 운동가들의 활발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회 현장을 취재한 ‘시민의 신문’에 따르면 ‘시민사회 정치세력화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벌인 토론회에 참여한 운동가들은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가면을 벗어 던져야한다는 데에는 대체적으로 동의했지만 정치참여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시민운동의 정치참여를 찬성하는 운동가들은 시민단체는 이미 ‘준정당적 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부패정치 청산이 시대적 요구인 만큼
정치참여를 모색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고, 반대하는 활동가들은 정치개혁이 시민운동의 주요이슈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문제들을 개혁해 건강한 시민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며 정치참여는 내외적으로도 지지받기 어렵다며 이견을 나타냈다.
정치세력화를 찬성하는 인천시민네트워크 이재병 사무처장은 “시민단체는 이미 준정당적 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정책도 중립적이지 않아 당으로서의
지반공사는 다져져있다”면서 “사회가 강요하는 시민단체 중립성이라는 허위의식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반대입장을 표한 송재봉 충북참여자치
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시민단체의 준정당성은 인정하지만 정치참여와 시민사회 개혁이 함께 가야지 평향적으로 역량을 집중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정치는 시민사회 성숙도에 맞춰가는 것이기 때문에 몇몇 진보적인 인사의 정계진출만으로 개혁되지 않는다”면서 정치세력화에
심사숙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대화 교수는 “최근 몇몇 언론이 시민사회의 정치세력화를 시민사회단체의 정치세력화인양 보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단체의 정치세력화가
아닌 시민사회의 정치세력화”임을 강조하며, “용어의 쓰임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또 “시민운동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정치권과 수구세력이 만들어 낸 잘못된 인식”이라며, “그 어느 시대에도 시민운동이 중립적이었던
적은 없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어느 사회나 국민을 대표하는 세력이 정치를 해왔다”며 “이제는 시민사회 모두가 정치에 참여해 국민이
주인된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범수 기자 skipio@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