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피폭자에게 평등 원호를”
한국인피폭자 권리 찾기에 평생 바친 이치바 준코
“일본인인
나 자신이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부채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해 이 일을 시작했다.”
한국인원폭피해자를 위한 삶이 전부인 이치바 준코(48) 씨는 10월18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의 히로시마’ 출판기념회에서
이 같이 말했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장장 27년을 한국인피폭자 권리 찾기에 앞장선 이치바 준코. 그녀가 쓴 ‘한국의 히로시마’는 아픈 역사의
기록이자, 철저히 소외당하고 고통받았던 피폭자들을 위한 진혼굿이었다. 이 책은 현재 국내 신고된 피폭자 가운데 26%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희생자를 낸 경남합천 사람들이 왜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으며, 피폭 후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철저히 추적했다.
이치바 준코는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쓰게 된 동기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국인피폭자문제의 과제 등에 대해 능숙한 한국어로 조근조근
설명했다.
한편, 그녀는 이날 한국적십자사로부터 피폭자 구제활동에 매진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다.
그녀의 이번 방문은 피폭자 부친을 둔 한나라당 강인섭 국회의원과 책을 출판한 역사비평사 김백일 사장의 공동초청으로 이뤄졌다.
한국인피폭자 철저히 소외
1945년 8월, 원폭이 투하됐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인구는 총 69만여 명이었고 23만4,000여 명이 피폭사했다. 두 도시에 한국인은
7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무려 4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공식집계됐다. 한국인피폭자는 외국인피폭자 전체의 90% 이상에
달한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따르면 생존자 3만여 명 중에서 2만3,000여 명이 조국으로 돌아왔다. 2003년 현재 남한에 2,200여 명, 북한에
2,000여 명의 피폭자가 생존해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피폭 후 58년 동안 한국인피폭자는 일본과 한국정부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했다. 일본정부는 1957년 ‘원자폭탄피폭자의 의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피폭자에 대한 원호를 활발히 진행했지만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은 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한국정부도 지난 1965년 체결한 한일청구권협약에 의거, 공식적인 보상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1990년에는 일본정부가 ‘인도적 관점’에서
건넨 의료지원금 40억 엔을 받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2월18일은 한국인피폭자들에게 역사적인 날이었다. 4년 넘게 끌어온 일명 ‘곽귀훈(경기 성남 거주) 재판’이 마침내
승소, 일본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일본정부로부터 원호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일을 해낸 것은 키 150cm, 몸무게 45kg 정도의 왜소한 일본인 이치바 준코. 그녀는 재판이 시작된 그날부터 곽씨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녀는 1970년대 중반에도 이와 비슷한 재판을 도운 적이 있었다.
‘손진두 재판’과 ‘곽귀훈 재판’
한국인피폭자원호와 관련해서는 두 개의 큰 전환점이 있었다. ‘손진두 재판’과 ‘곽귀훈 재판’이 그것이다.
손진두 재판은 1970년, 부산에 거주하던 손씨가 피폭치료를 받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다 적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자 일본 시민사회가
들고일어나 재판을 지원해 결국 승소한 사건이다.
손씨는 1974년 3월30일 제1심 판결, 1975년 7월17일 제2심 판결, 1978년 3월30일 최고재판소 판결에서 승소하고 일본인피폭자와
마찬가지로 피폭자건강수첩을 교부받았다. 피폭자건강수첩이 있어야만 일본에서 치료의 혜택과 원호수당을 받을 수 있다.
이 재판을 계기로 한국인피폭자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피폭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인피폭자들의 도일이 많아지자 일본 내에 거주관계를
가지는 피폭자에 한해서만 피폭자원호법을 적용시켰다. 치료를 받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수첩은 압수당했다.
이처럼 불합리한 규정은 곽귀훈 재판으로 철폐됐다.
곽귀훈 씨는 1998년 5월 방일해 5년 동안 건강관리수당(매월3만4,000엔)을 지급받기로 하고 오사카의 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곽씨가 한국에 귀국한 것을 계기로 일본정부는 수첩을 압수하고 수당지급도 중단했다.
이에 곽씨는 그 해 10월1일,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국인에 대한 명백한 차별”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곽씨는 지난해 12월5일 고등재판에서
승소했고 12월18일에는 일본정부가 최고재판소에 상고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로써 한국인피폭자들은 거주지가 일본이 아닐지라도 매월 건강관리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할
길이 열리게 됐다.
“일본정부 고발하기 위해 집필했다”
이 모든 것은 이치바 준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곽귀훈 씨는 자신의 재판 과정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이치바 준코의 신념과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이치바 씨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기지 못 했을 재판이었다. 재판에 질 것 같아서 포기하려고 하자 그녀는 ‘지더라도 해야 한다. 그게 역사적
사명이다’면서 변호사 7명을 총지휘했다. 나는 몸만 한국에서 왔다갔다했을 뿐, 재판은 그녀가 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라고 말했다. 여전히 일본정부가 한국인피폭자 스스로 피폭사실을 증명하도록 하는 등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폭자에게 짐을 떠넘기지 말고 일본정부가 직접 나서서 조사하고 인정해줘야 한다. 58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이 피폭자임을 스스로 증명하기는
매우 힘들다. 한국인피폭생존자 2,200여 명 중에서 1,000여 명만이 건강수첩을 받았는데, 남은 사람들 중에는 건강 및 재정적인 이유,
그리고 피폭사실을 증명할 수 없어 포기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녀는 일본정부가 직접 나서는 것과 함께 한국인피폭자들이 일본에 가지 못 하더라도 한국에서 피폭자 신청을 하고 국내 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피폭2세를 위해 일본과 마찬가지로 무료 건강검진을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그녀는 ‘한국의 히로시마’ 출간과 관련, “한국원폭피해자를 내팽개친 일본정부와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면서 “모든 피폭자에게
평등한 원호가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투쟁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인피폭자를 위해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문제에 무관심했던
한국인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27년 동안 한국인피폭자원호를 하며 익힌 수준급의 한국어 솜씨를 가지고 ‘부업’으로 일본 내 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김동옥 기자 aeiou@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