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문명화된 시대에도 자국 이익을 위한 전쟁과 테러가 난무하고 난민과 기아와 질병이 만연하다. 그속에서 미래 주인인 어린이들이 세계곳곳에서 희생되고 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화에 어린이들은 목숨을 빼앗기거나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 어느때보다 ‘평화’가 절실하다.
올해로 개관 3주년을 맞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관장 원종현)이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을 기념하며 특별전시 <PEACE for CHILD : 전쟁 속 어린이를 위한 평화의 기도>전을 개막해 관심을 모은다.
‘세계 아동노동 반대의 날’이던 지난 12일 ‘평화’의 염원을 담아 개막한 <PEACE for CHILD>전에는 곽남신, 김유선, 김주연, 뮌, 박미화, 박영균, 서용선, 손종준, 임영선, 정정주, 최수진, 하태범, 한진수, 허보리 등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14인의 작가가 참여했다. 어린이·전쟁·인권을 키워드로 한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출품작 80여점은 한점한점 내공이 깊다.
전시명 ‘PEACE for CHILD’는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인접한 폴란드 국경지역에서 어린이들이 전쟁 반대를 외치며 들고 나선 피켓의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이 전시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전쟁’과 전쟁으로 인해 유린되는‘인권’,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위협받는 소중한 생명인‘어린이’라는 세 개의 주제를 현대미술의 다양한 조형언어로 풀어내었다.
알란 쿠르디 같은 희생자 없는 '평화'를 기도하는 작품들
박물관으로 들어서는 초입 왼쪽 벽면에는 자개의 영롱한 빛이 눈실을 끄는 지름 2m의 둥근 원반이 설치되어 있다. 전시의 인트로가 되는 김유선의 자개로 만든 ‘무지개’ 설치 작품은 자개로 무수한 동심원을 작품 속에 만들었다. 작가는 이와 더불어 2분 40초 길이의 비디오 영상 신작 '바다에서 태어난 무지개'도 출품했다. 작가는 영상 마지막 부분에 어린이를 상징하는 진주를 등장시키면서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한진수는 탄약상자를 이용해 만든 송풍기 박스의 바람으로 검정 비눗방울을 벽면에 날려 보내 부딪치게 하고 그 흔적을 보여주는 기계 퍼포먼스 작품 '버블 워(Bubble War)'를 보여준다.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볍고 즐거운 놀이임에도 작품의 비눗방울은 전쟁을 상징하는 검정이다. 어린이들의 꿈이 아닌 전쟁에 대한 공포가 흘러내리는 것 같다.
박미화는 묘비명 같은 그림 조각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와 합판에 아크릴과 커터칼로 그은 종이에 아크릴과 목탄으로 그린 그림 ‘피에타’, 점토로 제작한 입체물 '비석'과 '풀나무' 등을 출품했다.
하태범은 ‘피에타’ ‘소년’ 조각과 영상 작업을 같이 했다. ‘피에타’의 고전은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이다. 하지만 하태범의 ‘피에타’는 전쟁과 기아에 신음하는 깡마른 소년을 예수 대신 성모 앞에 배치했다. 새로운 시사점을 준다. 대형 백색 조각 '소년'은 이마 위가 잘려나간 소년 흉상이다. 하태범의 4채널 영상작업 '어린이들'과 '눈물'은 길이 20m, 높이 7m인 4개의 벽면에 3차원 영상 시스템을 갖춘 지하 3층 콘솔레이션홀 벽면에서 볼수 있는 전시의 백미이다.
곽남신은 지하1층 복도 안쪽 독립된 전시공간에 '덫' 시리즈를 설치했다. 그의 덫 시리즈는 작가의 작업실을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와 설치한 것 같은 작업이다. 전시 주제인 전쟁과 어린이 그리고 인권에 관한 사유를 할 수 있다. 작가가 살아오면서 틈틈이 오브제를 수집해 가공하거나 새로 제작한 작은 조각들을 한데 모아 놓았다.
서용선은 6.25전쟁 중에 태어난 작가의 가족사를 회화 '피난: 배를 기다리는 가족'과 채색 조각작품 '병사들'로 선보였다. 그림 속에는 이불을 뒤집어 쓴 어머니과 세 딸, 강을 건네줄 배를 기다리는 아버지, 한강 이남으로 피난왔다가 만삭의 몸으로 다시 집으로 향하는 가족들을 그렸다. 어머니는 서용선 작가를 잉태한 상황이었다 한다. 목판에 거칠게 그려진 병사들과 한복 입은 여성들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인다.
박영균은 지구의 온난화로 바이칼 빙하가 녹으며 급변하는 생태계, 체르노빌의 원전 폭발사고를 비롯해 인류를 위기로 몰고가는 전쟁, 환경, 기아, 인권 등을 경고하는 듯한 작품을 출품했다.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폭 6m의 대작 '얼음의 눈물'은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근방에 사는 몽골리안 샤먼의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수호신을 그린 것이다. 이 수호신은 늑대의 얼굴에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강렬하게 관람객을 마주본다.
최수진은 폭 7m에 가까운 대형 그림 '레인보우 피플'은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빛을 사람의 형상으로 펼쳐놓은 군상이다. 일곱 색이 의인화되어 화면에 올라온 인물들은 말풍선처럼 묘사된 가쁜 숨을 내쉬며 서로에 관심을 나타낸다. 작가의 유쾌한 상상력과 호기심이 관람객들에게도 밝은 에너지, 희망을 전달한다.
김주연은 버려진 여자아이와 성인 여성의 옷을 주워서 그옷에 씨앗을 심은 후 싹이 트고 자라는 과정의 퍼포먼스를 사진 작품화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의 가벼움' 시리즈는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사유, 삶과 죽음의 순환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낸다.
정정주는 스테인리스 스틸판으로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 모니터를 설치한 '균형의 방'과 '로비' 연작 2점을 내놓았다. 빛과 공간 연구에 몰입해 온 작가의 노정을 건축 모형물을 통해 구현해냈다. 영상 속의 여성은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자신의 상처에 대해 언급한다. '로비'는 압축된 실재 공간과 가상의 영역이 어우러진 기묘한 증강현실의 세계를 보여준다.
손종준은 소강당에 알루미늄 재질로 만든 갑옷 시리즈 'Defensive Measure' 7점과 디지털 프린트 4점을 소개한다. 소강당 정면에 거대하게 펼쳐놓은 갑옷은 약자의 자기 보호 도구임에도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이 지닌 정신적 트라우마의 크기를 보여준다.
허보리는 양복과 이불 천으로 만든 탱크 '부드러운 K9' 한 점과 넥타이를 바느질해 만든 수류탄과 소총 그리고 '블루밍 행주'를 내놓았다. 작가는 부친(만화가 허영만)과 달리 양복차림으로 매일 직장에 출근하는 남편을 보며 양복은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서 입는 갑옷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거대한 철재 덩어리인 탱크를 부드러운 천으로 재현한 작가는 넥타이의 표면에서 수류탄 이미지를 떠올려 작품화했다고 한다.
임영선은 시리아 내전으로 가족과 피난 중 모드룸 해변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 세살배기 어린이 알란 쿠르디를 재현한 설치작품을 내놓았다. 관람객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이 작품은 CF 촬영지로도 인기있는 박물관 내의 ‘하늘정원’에 모래밭을 조성한 설치 작업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형상화되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인체 조각 '발칸 전쟁의 기억' 한 점도 출품했다. '발칸 전쟁의 기억'은 내란에 의해 피를 나눈 국민들이 서로를 죽이는 상황을 표현한 작품이다.
뮌(김민선, 최문선)은 하늘정원 옆의 막인 통로 하늘길에 3분짜리 영상 작업 '휴먼 스트림'을 선보인다. 작은 군중 실루엣들이 30m가 넘는 통로를 무리지어 끝없이 전진하다가 서로를 짓밟으며 치열하게 벽을 타고 상승하는 모습의 영상 작업이다. 탐욕에 쩐 현대인들의 질주하는 모습이다. 군중들의 모습은 빛과 그림자의 조율을 통해 만들어냈다. 작가는 미디어 영상과 오브제 설치작업을 통해 도시와 군중에서 개인의 심리적 경험에 대한 기억을 드러내며 국내외 미술계에서 주목받아 왔다.
‘세계 아동노동 반대의 날’인 12일 개막
지난 6월 12일 개막식에는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염수정 추기경, 손희송 총대리주교, 원종현 관장을 비롯해, 남희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 박미정 환기미술관 관장,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김영호 예술감독, 이용덕 박물관 미술위원장, 정현 홍익대 교수 등이 사승환 부관장과 큐레이터의 안내 속에 전시를 관람했다. 아울러 CPBC소년소녀합창단이 촛불을 들고 등장,‘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등을 노래하며 이번 전시 개막을 축하했다.
이날 정순택 대주교는 “우리는 늘 평화를 갈망해야 한다. 평화는 정의와 사랑의 열매”라면서 “우리의 평화 염원 기도가 기적을 만들어내길 바란다”고 인사했다.
김영호 예술감독은 “문명사적 전환기로 불리는 오늘날의 현실 속 이번 전시가 전쟁으로 희생되고, 억압받는 어린이들의 인권에 대해 성찰해보는 자리이다”라며“전쟁과 같은 경쟁의 삶 속에서 독립적인 인격체로 건강하고 정의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생각해 보는 전시다”라고 기획 취지를 전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위치한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 후기 국가 공식 처형지이자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44명의 순교 성인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한국 최대 천주교 순교성지인 동시에 특정 종교의 경계를 넘어 문화의 보편성과 다양성의 가치를 실현하는 시민사회를 위한 열린 복합문화공간이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박물관이 갖는 전시, 교육, 공연 등 문화 지원 서비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 아니라 미사, 영성강좌와 같은 영적 지원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원종현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장은 “국가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은 오로지 대화이다”라며“이번 전시가 반목과 대립을 넘어 죽음의 문화를 끊고 생명의 문화를 키우는 전초기지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8월 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