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암 투병을 겪으며 붉은 실을 엮은 작품들로 한국팬들을 사로잡은 작가 시오타 치하루(50)가 드디어 한국을 찾았다. 가나아트센터에서 준비한 두 번째 개인전 <인 메모리(In Memory)> 전시를 위해 내한, 보름간 준비를 거쳐 전시를 지난 15일 오픈했다.
2년전 <Between Us>전 때는 코로나19로 내한하지 못한 반면, '기억'을 주제로 한 <In Memory>전에는 일찌감치 내한해 한국에서 전시 준비를 마무리 했다.
시오타 치하루는 부산 출신 남편과 독일 베를린에 살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일본인 작가이다. 재독한국인 가족인 시어머니 덕에 한국 음식을 자주 먹어 한국적 정서에 친숙하다는 그는, 소설가 한강의 ‘흰’에 감명받아 흰색을 메인 컬러로 한 이번 전시를 완성했다고 밝혔다.
"국적을 떠나 사람 자체가 너무 좋아 결혼했다"는 남편과 함께 읽은 한강의 소설 ‘흰’은 2018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소설이다. 세상의 흰 것들을 통해 상실과 애도, 부활을 다룬다. 안개, 흰 도시를 비롯해 65개의 흰 것의 표상으로 이뤄져있다. 51번째 '경계'에 이르러 아주 어려서 죽은 아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으나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화자의 언니 이야기가 ‘나’의 시선에서 죽은 언니의 시선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옮겨가며 쓰는 애가이다.
전시 오프닝에 앞서 만난 시오타는 “생과 사를 겪는 과정에서 죽음을 연상하며 2년전 빨간색의 작품을 했다면, 코로나팬데믹을 겪으면서 이번 전시에는 흰색을 메인 컬러로 썼다”고 밝혔다.
아울러 "소설 ‘흰’ 속 아이의 죽음처럼 자신도 암 때문에 유산했던 아픈 경험이 있었던 만큼, 죽어가는 아기를 향해 ‘죽지마 죽지마 부탁할게’ 라는 소설 속 어머니의 마음은 큰 감동이었다"고 덧붙였다.
이 소설에서 전시 영감을 얻었다는 시오타는 "아이를 둘러싼 모든 것이 흰색이고, 개인적으로도 흰색에 얽힌 ‘기억’도 많아서 ‘흰색’으로 꼭 작품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전시명도 <In Memory>로 정했다.
전시에서 ‘흰색’은 생(生)과 사(死) 모두를 다 아우른다.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덤에서 느낀 공포, 이웃집의 화재, 두 번의 암투병으로 겪어야만 했던 죽음에 대한 불안 등은 작품 속에 '삶과 죽음'을 다루는 계기가 됐다. 그에게 삶과 작품이 별개가 아닌 것이다.
<In Memory> 전시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길이 7m의 흰배와 흰 원피스, 온통 엉킨 흰 실타래들로 꾸며진 공간이다. 흰배는 기억의 바다에서 방황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흰 원피스의 주인공은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묻는 것 같다. 온통 전시장을 물들인 흰색들은 죽음과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시오타는 실을 활용한 작업과 더불어 세포를 연상시키는 조각들, 그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일상적인 소품을 활용해 존재와 내면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고 있다. 전시에는 설치작업 뿐 아니라, 회화, 드로잉, 조각 등 그의 전반적인 작업을 총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기억을 통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작가의 여정이 담긴 전시인 것이다.
또다른 코너에는 유리와 네트 형태의 구조물이 엉킨 세포를 형상화한 ‘cell’ 연작, 혈관과 세포 혹은 피부를 연상케 하는 작품들로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시오타는 독일 중고시장에서 오래된 물건들을 수집해 오브제로 활용하곤 한다. 독일에서는 망자의 물건들이 주로 중고시장에 나오는데, 그는 오래된 책, 놀이용 카드, 의자, 사진 등 오랜 세월 망자와 함께 했던 골동품들을 하나하나 수집하며 망자의 기억도 함께 모은단다.
“러브레터나 가족 사진 등을 소중하게 수집해요. 사람의 일생이 길게 느껴지지만 우주 전체로 보면 인간의 삶은 1~2초도 안될 겁니다. 시간의 차이를 많이 느끼게 되는 거지요. 소중한 것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일본 오사카 출신인 작가는 일본 교토 세이카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1996년 독일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에 진학했다. 이어 브라운슈바이크 예술대학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레베카 호른을 사사했다. 전시는 8월2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