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해온 작가 강익중(62)이 12년만에 국내 팬들을 만났다. 갤러리현대가 12월 11일까지 펼치는 개인전 <달이 뜬다>전이 그 현장이다.
12년만의 개인전이라 의욕도 넘친다.
전시장에는 ‘강익중’ 이름 석자를 세계미술계에 알린 ‘3인치 회화’ 연작을 비롯해, ‘달항아리’ 그리고 ‘달이 뜬다’ 드로잉 등 주요 연작 200여 점과 12년간 세계 곳곳에서 공개한 대형 공공 프로젝트 스케치 및 아카이브, 작가의 시(詩)도 함께 출품했다.
강익중이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후의 작품 계보를 비롯해, 앞으로 변화의 방향성도 내다볼 수 있는 자리다.
전시 백미는 달과 달항아리(白磁大壺)를 매개체로 한 작품들과 그를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올린 ‘3인치’ 회화들이다. 그리고 동양화의 화법을 차용한 최근작 회화 ‘달이 뜬다’ 연작, 밥그릇 국그릇 500개와 DMZ 부근에서 녹음한 새소리로 작업한 설치작품, 틈틈이 작업한 시(詩)와 12년간 세계 곳곳에서 공개한 대형 공공 프로젝트 스케치 및 아카이브까지 관객을 위해 풍성한 즐길거리를 준비했다.
‘달’과 ‘달항아리’
『달항아리에서 항아리를 빼니 달이 되었다 / 달항아리에서 사랑을 빼니 달이 되었다 / 달항아리에서 나를 빼니 달이 되었다』(강익중 시 ‘달이 되었다’)
1층 전시장과 두가헌갤러리에서 만나는 작품은 ‘달’과 ‘달항아리’ 작품들이다. 강익중에게 ‘달’과 ‘달항아리’는 ‘우주’겸 ‘하늘’이자 그의 ‘마음’이다.
눈처럼 하얗고 정결한 순백의 달항아리는 소박하면서도 수수한 매력을 보여준다. 달덩어리 같다고 해서 ‘달항아리’라는 이름이 붙은 백자 항아리는 풍만하고 꾸밈없는 형태와 담백한 유백색이 특징이다. 자세히 보면 몸통 한가운데 가장 불룩한 부분이 어긋나 있다. 약간 비뚤어져 어깨 부위의 좌우 높이가 차이가 난다. 달처럼 완벽하게 둥그런 모습이 아니라 약간 불균형하고 불완전하지만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달항아리를 두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은 “넉넉한 맏며느리 같다”고 했고, 미술사학자겸 고학자 김원용 선생은 “이론을 초월한 백의(白衣)의 미”라고 노래했다. 김환기는 “목화처럼 다사로운 백자, 두부살 같이 보드라운 백자, 쑥떡 같은 구수한 백자”라며 백자 달항아리를 사랑했다.
많은 작가들이 달항아리에서 예술의 영감을 찾았다. 백남준도 그랬고, 김환기, 장욱진, 도상봉, 구본창, 고영훈 등이 그랬다. 강익중도 자연스럽게 달항아리에 매료되는 계기를 만난다.
2004년 일산 호수공원에서 큰 원형 구조물을 완성하다가 작품 한쪽이 기울어지는 형상을 보면서 어린시절 그를 매료시켰던 달항아리를 떠올렸다.
“달항아리는 상부와 하부를 합쳐 그 사이를 손으로 잇고 가마에서 하나의 몸채로 완성됩니다. 그 제작 방식과 형상에서 제가 그간 몰두했던 ‘연결’의 사상을 떠올렸어요. 즉 그간 남과 북, 동양과 서양, 인간과 자연 등의 조화와 융합, 하나됨을 생각해왔는데 달항아리를 통해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더라구요.”
강익중에게 달과 달항아리는 곧 그 자신이다. 1984년 홍익대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날아간 가난한 고학생. 고달팠던 그에게 ‘달’은 따스한 정(情)과 사랑의 매개체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향과 타향에서 과거와 현재, 한국과 미국 등 서로 다른 대상 혹은 단절된 대상을 서로 연결하는 주요한 매개체로 발전한다.
달항아리는 하나의 기표(記表 signifiant)로 많은 달항아리와 달항아리 그림들로 거대한 설치미술이 되기도 하고, 남북간의 분단을 달항아리를 통해 이어붙이려는 예술 프로젝트(광화문 아리랑. 2020)가 되기도 했다.
강익중의 달항아리는 또 그만의 매력을 발산한다. 작업 과정에서 손으로 만져서 거칠고 매끄러운 표면의 촉각적 질감을 풍성하게 만드는가하면, 유백색의 은은한 색감과 살짝 비례가 깨어진 풍성한 곡선, 불완전한 하는 동시에 일그러진 형태의 달항아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마치 먹의 농담(濃淡)을 잘 살려낸 수묵 회화 같은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런가하면 달 주위에 나타나는 달무리가 다채로운 모습으로 공존하는 연작 ‘달이 뜬다’는 다채로움과 상호보완의 미(美)를 보여주기도 한다.
통일에 대한 염원 다룬 설치작품 <우린 한식구>
2층 전시장에는 산과 자연을 주제로 한 드로잉 연작 ‘달이 뜬다’ 30여점이 걸려있다. 전통 산수화를 재해석한 신작이다. 화면의 여백과 획의 비중을 6대4로 채우는 동양화의 기본 원리를 바탕에 두고, 먹을 사용해 산과 들, 달과 폭포, 달항아리, 사라과 집, 새와 강아지 등을 함께 그려 넣고 그 바탕으로 다채로운 색의 오일 파스텔로 칠했다.
‘산’ 연작은 48x48cm 개별 작품이 군집을 이뤄 약 4.5m 높이로 설치된 것으로 수묵산수화를 보는 듯한 장엄한 풍경을 연출한다. 화면의 높이를 다르게 한 작은 나무 조각을 모아 붙인 뒤 표면을 불로 태우거나 그을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듯한 산세를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완성한 것이 특징이다.
전시장 구석에서 만나는 ‘우리는 한 식구’는 낡은 밥그릇 500개를 뒤집어 산처럼 쌓고 그 사이로 DMZ 지역에서 녹취한 새 소리를 전시장에 울려 퍼지도록 한 설치 작품이다. 마치 밥을 먹듯이 일상에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우리’를 ‘식구’라고 칭한 작가는 남과 북, 가족과 민족의 의미를 환기한다. 엎어진 그릇들은 동그라미로 서로 이어져있다.
“7년전부터 어릴 때 쓰던 밥그룻, 국그릇을 샀다”는 강익중은 “남과 북은 한 식구이면서도 밥을 나누지 못하는 식구인 것 같다. 언젠가 밥을 나눌 수 있는 때가 오리라 믿지만, 안타까운 현실이다”고 말했다.
“갈라지고 찢어진 것을 함께 잇는 것이 내가 할 일이자 존재의 이유”라는 작가는 “세계 곳곳의 아픔을 문화로 치유하고 싶다.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사명감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익중표 3인치 회화
지하에서는 작가가 유학 초기인 1980년대 중반부터 해오던 ‘3인치 회화’의 오늘을 볼 수 있는 ‘내가 아는 것’ 연작이 반긴다.
3인치 회화야말로 가장 강익중 다운 작품이다. 홍익대 미대(서양화과)를 졸업하고 3000달러를 들고 갔던 미국 유학길. 프랫인스티튜트 학생이지만, 고학생이었기에 12시간의 아르바이트를 감당해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게를 달려가 점원을 해야 했고, 짬짬이 노점상으로 나서야 했다. 큰 캔버스 앞에 앉을 여력이 없었기에 생각한 것이 가로 세로 3인치 크기의 캔버스. 손바닥에 쏙 들어갈 크기의 미니 캔버스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지하철로 학교와 일터를 오갈 때 그림을 그렸다. 거대한 모자이크를 연상시키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3인치 회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남들이 생각지 못한 3인치 회화를 통해 그는 작가로서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백남준과의 휘트니미술관 2인전 <멀티플/다이얼로그>전(1995), 베니스비엔날레(1997) 한국관 대표작가로 출품 후 특별상 수상, 파주 통일공원에서 <10만의 꿈>(1999), 뉴욕 UN본부에서 <놀라운 세상>(2001), 상하이엑스포 한국관 <내가 아는 것>(2010), 순천만 국가정원의 ‘꿈의 다리’(2013), 런던 템즈강 페스티벌 출품작 <집으로 가는 길>(2016), 6.25전쟁 70주년 기념 <광화문 아리랑>(2020) 등이 가능했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런던 대영박물관, 뉴욕 휘트니미술관, 로스엔젤레스현대미술관, 보스턴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인 마가렛 리(한국명 이희옥.61), 아들 이기호(24)와 함께 내한했다 미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