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역경비만 하루 2,000만원 넘어
“영하의 매서운 추위는 그나마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좌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이다. 내 생명, 내가 부양하는 10명 넘는 가족의 생명. 그러니 제발 돌려다오.”
좌판을 빼앗긴 나윤순(58) 씨는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제발 좌판만은 돌려달라고 가로정비 용역들을 향해 고함을 치기도 하고 인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펼치고 빼앗고. 복원공사가 한창인 청계천 일대는 노점상과 서울시 간 전쟁중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서 거리로 나선 노점상들. 그러나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생계가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청계천 일대 노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간 요즘 같아선 도무지 살 수가 없다.
서울시의 이중성
애초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생계형 노점상은 단속하지 않기로 7월15일 합의했다. 그런데 10월13일에는 청계천 가로변 5m 인도폭을 3m로 줄이고, 지난 11월30일 새벽에는 청계천 일대 노점상에 대해 대대적인 강제철거에 들어갔다. 약속을 어긴 것이다.
철거과정에서도 서울시는 노점상들의 분노를 샀다. 11월30일 새벽 청계천 일대는 전쟁을 방불케 했다. 철거작업에는수천명의 공무원과 용역인력이 동원됐다. 이 과정에서 폭력까지 행사해 몇몇 노점상이 부상당했다. 서울시는 당시 서울역 노숙자들에게 일당을 주고 일부 용역을 주기도 했다. 따라서 서울시는 노숙자를 이용, 빈민갈등을 부추겼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이날 청계천 노점상에 대한 강제철거 후 일당지급이 늦어지자 용역반으로 동원된 노숙자들이 농성을 하는 씁쓸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11월30일 이후 청계천 노점상들은 장사를 거의 못 하고 있다. 서울시가 고용한 가로정비용역 300여명이 수시로 지나다니면서 단속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월10일 찾은 청계천상가 일대는 행인보다 이들이 더 많았다.
20년을 넘게 청계천에서 장사를 했다는 한 노점상은 “매일 아침, 오늘은 좌판을 펼칠 수 있으려나 기대를 갖고 나와봐도 달라진 게 없다”면서 “기왕 나온 김에 어떻게 해서든 1,000원 차비라도 벌고 가겠다”고 말했다.
10% 수준으로 매상 줄어
청계천 8가 17동 앞에서는 만물상을 하는 안진수(46) 씨가 가로정비용역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좌판을 펼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청계천 노점 생활 10년이 넘은 안씨는 공사 시작 전만 해도 평일 평균 10만원, 주말에는 30만원 정도의 매상을 올렸다. 그러나 공사 후 매상이 10% 수준으로 줄었다.
그래도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 다른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는다. 또 그럴 자리도 없다. 이곳을 떠난 미래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직은 좌판을 빼앗기지 않았으니 견딜만 하다. 그는 “좌판을 빼앗긴 노점들이야말로 죽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주변 상점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중고 카메라 가게를 운영하는 한 상인은 “유동인구가 엄청나게 줄어서 생계가 막막하다”고 했다. 이 상인에 따르면 한창일 때는 서너평밖에 안 되는 가게의 권리금이 7∼8,000만원을 호가했는데, 요즘은 숫제 공짜로 줄 테니 들어가서 장사하라고 해도 안 하는 판이라고 한다.
“마치 계엄령이 내려진 것 같다”
온통 까만 의상을 갖춰 입고 체구도 큰 가로정비용역들은 수시로 청계천 가로변을 왕복 순찰했다. 20명 남짓씩 몰려다니는 게 행군하는 군인들을 방불케 했다. 그들이 행인을 비켜가기 보다는 겁을 먹은 행인들이 비켜서는 형국이었다.
1995년부터 성인비디오 노점을 해왔다는 우모(29) 씨는 “청계천은 지금 계엄령이 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우씨는 “5·18 광주도 아닌데, 용역들이 좁은 보도를 2∼30명씩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경찰 행세를 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서울시는 이들 용역을 일당 7만원씩에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계천 일대만 300여명의 용역이 진을 치고 있다. 그렇다면 하루 지불되는 비용만 2,100만원인 셈이다. 11월30일부터 이들 용역이 고용됐으니 12월10일 현재 벌써 2억3,000여만원이 이들에게 쓰인 것이다.
서울시는 노점상과 관련, 대안이 없다.
성인 잡지와 용품을 파는 배모(32) 씨는 “서울시가 청계천 노점상 이주단지로 제시한 동대문운동장은 400개 정도밖에 수용하지 못 한다”고 말했다. 청계천에 있는 노점의 총수는 약 1,000개가 넘는다. 나머지 노점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는 것이다.
“점유권은 무형자산”
한 노점상은 서울시가 점유권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옷장사를 하는 조정석(53) 씨는 “소유권과 점유권은 다른 개념”이라면서 “묵계에 의해 한 자리에서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년씩 장사한 사람들의 무형자산인 점유권은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씨의 말대로 청계천 노점은 오랜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곳은 그 사람들의 터전이다. 그런데 공사를 시작하면서 “불법이니 나가라”고 서울시는 아무런 대책없이 몰아붙이고 있다.
서울시의 일방행정은 비난의 소지가 많다. 대책을 강구해주고 일을 진행해야 순리라는 게 대체적인 지적이다.
12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새해를 맞이하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 시기. 그러나 청계천 노점상에게 희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