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부삼 기자]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20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 전 총재는 제7대 국회인 지난1967년 신민당 전국구로 정계에 입성한 뒤 8대에서 10대까지 부산 동래에서, 12대와 13대는 부산 해운대에서 당선되는 등 7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 전 총재의 공화당과 3당 합당시, 이를 거부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이끌기도 했다. 또 한나라당 부총재,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등 여야를 두루 아우르는 정치 행적을 기록했다. 2008년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도 지냈다.
고(故) 이기택 전 총재는 1960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4·19 의거를 주도한 뒤, 1967년 신민당 전국구로 정계에 입성하면서 정계에 발을 디뎠다. 이후 2011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서 물러나기까지 그는 40년 정치 인생에서 유력대권 주자와 같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지만,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물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까지 현대 정치사의 주요 거물들과 동시에 정치적 인연을 맺어 온 몇 되지 않는 드문 정치 이력의 소유자다.
◆YS, DJ, 노무현, 이회창과 반복된 인연과 악연
7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 신민당에서 YS 계보에 속하며 부산의 대표적 중진 정치인으로 성장했고, 80년대 들어선 신민당 사무총장과 부총재, 통일민주당 부총재를 역임했다.
하지만 1990년 YS가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이른바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을 만들자, "3당 야합에 불과하다"며 합류를 거부하면서 YS와의 인연을 접었다.
이때 민자당 합류를 거부한 대표적 인사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홍사덕 이철 전 의원 등은 민자당 합류를 거부하며 이른바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어 91년 DJ의 신민주연합당과 영호남 통합을 기치로 합당을 선언, 고인과 DJ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1992년 대선에서 DJ가 YS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민주당 당권을 물러받은 고인은 차기 유력 주자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95년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DJ가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복귀하자, 민주당에 남아있던 대다수 인사들은 DJ를 따라 새정치국민회의로 떠났다.
DJ 정계복귀에 끝까지 반대한 고인은 조순, 이부영 전 의원과 함께 잔류 민주당을 이끌면서 1996년 15대 총선에 나섰으나 15석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거뒀다. 고인 역시 부산 해운대에서 낙선했다.
이후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조순 당시 민주당 총재와 함께 이회창 총재가 이끌던 신한국당과 합당을 결정, 한나라당을 만들면서 고인과 이회창 전 총재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러나 2000년 16대 총선 공천에서 한나라당의 '현역 43명 학살 공천'에 포함되면서 이회창과의 인연은 악연으로 얼룩졌다. 대선 재수를 앞두고 있던 이회창 전 총재가 당내 확실한 기반과 혁신 명분을 쌓기 위해 거물급 중진 인사들을 숙청했던 셈이었다.
이에 고인을 비롯한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전 의원과 조순 이수성 전 의원 등은 2000년 총선을 한달 앞두고 이른바 '반창(反昌) 연대'인 민국당을 급조했다.
하지만 2000년 총선 결과 지역구 1석(한승수 전 총리), 비례대표 1석이라는 대참패를 맞으며 민국당은 한국 정당사에서 최단시간 내 소멸하는 정당의 하나로 기록됐다.
고인은 2002년 대선에서는 꼬마민주당을 함께 이끌었던 '노무현'을 지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부산상고 선후배 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탄생 이후 대북 정책 등 일련의 정책을 비판하며 정치적으로 다시 결별했고, 2007년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내가 YS, DJ에 비위 맞췄다면 이기택 시대 왔을 것”
이처럼 한국 현대사의 주요 거물들과 정치적 인연을 맺었던 고인은, 생전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이들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인은 먼저 YS에 대해 "폭이 넓고 용기 있어 좋은 점이 많은 지도자인데, 속이 허한 사람"이라며 "군사정권이 만든 정당과 통합해 여당을 만들었던 YS의 정치행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혹평했다.
그는 그러면서 "지금도 여전히 YS가 주도한 3당 합당은 야합이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이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95년 DJ의 정계복귀에 대해선 "당시 (동교동계가) DJ의 복귀를 반대하던 세력을 무마하기위해 나에게 매달렸다"며 "동교동쪽에서 'DJ를 도우면 너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거절했다"고 했다.
그는 DJ의 정계복귀 역시 "80세 고령의 노욕으로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선 "꼬마 민주당 시절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 회의에서 동의를 받지 못하면 휙 떠나는 불안정한 성격을 이전부터 가지고 있어 조직이나 시스템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다"면서 "그렇긴 해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아 그런 장점을 활용하면 훌륭한 대통령이 되리라 기대했다"고 평했다.
그는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 내가 알았던 '노무현' 보다 더 도가 지나치다는 걸 알았다"며 "그 사람에게서 보지 못했던 어두운 나머지 절반을 발견했다"고 지지를 철회했다.
그가 가장 신랄한 비판을 이은 인물은 이회창 전 총재다.
그는 이 전 총재에 대해 "사고나 행동이 모두 귀족적이지만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와는 원래부터 안 맞는 사람"이라며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처음엔 나와 손잡고 청와대까지 간다는 생각을 심어줘서 믿었었는데, 결국 토사구팽 당했다"면서 "정말 졸렬한 사람"이라고 맹비난했다.
2000년 15대 총선에서 이 전 총재가 자신을 낙천 시키지만 않았어도 국회에 화려하게 복귀하며 훗날을 도모했을 것이라는 그의 한이 컸던 셈이다. 그는 15대 낙선 이후 다시 국회를 밟지 못했다.
고인은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정치 역정 40년을 자평했다.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살았다면 지금쯤 '이기택 시대'가 왔을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사는 것이 옳지 않다 판단해 내 길을 걸었다” 고인의 빈소는 강남성모병원이며 장지는 4·19 국립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