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로만 나돌던 고교등급제가 실제로 일부 대학에서 시행해 왔음이 교육부 실태조사 결과 현실로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파문이 대학과 고교간, 시민단체와 교육계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고교등급제를 적용한 것으로 드러난 대학들이 교육부의 시정 요구에 대해 이미 진행한 전형 일정을 바꿀 뜻이 없다고 밝히는 등 적극 반발하고 나섰다. 또 그동안 고교등급제 공방에서 비켜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서울대도 최근 본격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대학입시는 대학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지적한 데 이어, 서울대 김완진 입학관리본부장도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선 고교간 학력격차를 반영해야 한다”며 고교등급제 논란에 가세했다. 그동안 서울대는 논란 속에서도 그동안 국립대라는 위치 때문에 할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는데 서울대가 서울시내 사립대의 입장에 가세함에 따라 각 대학의 연대는 더욱 공고해졌다.
“학생선발권 대학자율화에 맡겨야”서울 주요 대학 입학처장들이 최근의 고교등급제 파문이 대학의 학생선발 자율권을 심각히 침해한다고 판단, 고교 간 학력차 실태 공개는 물론, 내신 부풀리기 현황과 고교평준화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자료 공개를 벼르고 있다. 지금처럼 ‘내신 부풀리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학생부 성적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서울 사립대 입학관계자는 “수시모집 지원자들의 학생부 성적을 살펴보면 대부분 전과목 ‘수’에 해당된다”며 “이같은 현실에서 내신성적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고 밝혔다. 한 대학 관계자 “고교등급제 적용은 내신만으로 수시모집 합격자 선발이 어려운 상황에서 대학이 선택한 고육지책”이라고 못박았다.
최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도 최근 “학생선발권을 대학자율에 맡겨야 한다”며 대학측의 입장을 지지했다. 교총은 또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사교육비 등 학생들의 과중한 대입 부담 해소를 위해 수능 자격고사화를 검토하고 대학별 본고사 시행도 3년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대학자율에 맡기자고 제안했다. 반면, 전교조는 “정상수업만으로는 치르기 힘든 문제가 출제돼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이중부담이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정부는 여전히 완고하게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달 13일 안병영 교육부 총리는 일부 대학의 고교등급제와 본고사 추진 움직임에 대해 “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내신 부풀리기’ 대학이 자청하지만 입시전문가들은 1998년부터 입시제도 변화에 반응이 빠른 서울 강남지역 학교를 중심으로 ‘내신 부풀리기’가 나타나기 시작해 2000년 이후부터는 ‘절대평가’를 염두에 둔 부풀리기가 본
격화했다고 분석한다. 즉, 대학들은 강남이 부풀리기 시작한 내신을 믿지 못하겠다며 고교등급제를 적용해 그 ‘강남’을 뽑은 것이라는 말이다.
김용근 종로학원 평가실장은 “주요 사립대학들이 정시 등에서도 내신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평어 등 절대평가를 중시하자 각 고교에서 ‘수’가 양산되기 시작했다”며 “내신의 불리함 때문에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르던 학생이 늘던 특목고에서도 대학에 들어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 자퇴생이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고교등급제 시행에 대한 논쟁은 인터넷 상에서도 뜨겁게 달궈졌다. 고려대 게시판에 올라온 아이디 ‘푸코(han272)’라는 학생은 “강남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들은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주변 아파트 살아서 그 학교에 간 것일 뿐이니 고교등급제는 정당성이 없다”는 나름의 논리를 폈다.‘폭우속의 통통이(lunaray)’는 “고교등급제는 반대지만 본고사와 같은 실력검증을 위한 제도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고교등급제’가 강남지역 고교 학생들에게 사실상 대학입시에서 혜택을 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강남과 강북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강북을 포함한 비 강남지역 네티즌들은 “강남사람이 아니면 대학도 못가는 것이냐”며 각종 사이트에 비난 글을 올리고 있는 반면, 강남지역 네티즌들은 “대학에서도 우수한 학생을 선발할 자유가 있다. 실력차가 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라고 반박하면서 지역간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아이디‘아도니스’는 “소수의 값비싼 인권만 존중하고 다수의 값싼 인권은 무시하는 이 나라를 더 이상 ‘우리나라’라 부르고 싶지 않다. 차라리 ‘강남민국’을 따로 만들라”고 분개했다. 이에 대해 ‘동감’은 “현실적으로 공부하는 양이나 질이 다르고 교육에 대한 투자도 다르니 실력차는 당연할 수 밖에 없다”면서 “차라리 정부가 대학의 학생 선발에 간여하지 말고 완전한 자유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 책임 가장 크다
이처럼 고교등급제 논란은 현행 대입제도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교육부는 그동안 △고교등급제 △본고사 △기여입학제 등 3 가지를 금지하는 ‘3불(不) 정책’ 고수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되자 기여입학제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더욱이 교육부는 사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가운데서도 2008학 년도 대입안을 조만간 확정짓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실제로 내신과 수능을 모두 9등급제로 묶어두는 새 대입안이 그대로 확정될 경우 변별력이 떨어져 대학들의 본고사형 대학별 고사를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를 사고 있는 형편이다. 때문에 소위 ‘3불(不) 원칙’을 법제화하고 이를 어길 경우 행·재 정 제재 수위를 강화하되 고교 간 교육프로그램 차이 등을 전형에 반영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자료는 제공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때문에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핵심이 정부에 있다고 지적이 많다. 교총은 “정부가 고교등급제 시행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지역간-학교간 교육격차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이 같은 사태가 촉발됐다”며 “사립학교법에서도 원칙과 소신없이 정치권과 이해집단의 압력에 흔들려 집단간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교조도 이 모든 책임이 교육당국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전교조 송원재 대변인은 “대학이 그동안 부인해 왔던 고교등급제 실시가 드러났는데도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에 대해 반성을 촉구했지만 대학을 궁지에 몰자는 것은 아니었다”며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교육당국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경희 기자 metell@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