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이경숙 기자]가수 겸 뮤지컬배우 제이민(28․사진)이 명실상부 뮤지컬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조승우·조정석 등 남자 뮤지컬스타들이 즐비한 뮤지컬 '헤드윅'에서 존재감이 부각된다.
'헤드윅'은 여장남장 이야기다. 동독 출신 '한셀'은 결혼을 위해 이름을 헤드윅으로 바꾸고 성전환수술을 받는다.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지만 버림 받고 실패한 트랜스젠더 록 가수로 살아간다.
제이민은 헤드윅의 새로운 남편 '이츠학'을 연기한다. 대학로에서 만난 제이민은 이츠학이 처음에는 복잡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여자인데 남자를 연기해야 하고, 근데 그 남자는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고. 복잡하더라"고 웃었다. 그러나 답은 간단했다. "본래 내 내면을 갖고 겉만 남자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했다. 이츠학은 남자의 모습이지만 내면은 여자니까."
유태인 출신 '이츠학'은 크로아티아 최고의 드랙퀸이었다. 인종청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지로 공연을 온 헤드윅에게 부탁, 미국으로 건너왔다. 역대 이츠학 중 가장 청아한 고음과 최고의 미모를 뽐내는 제이민의 이츠학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
앵그리 인치 밴드 멤버들과 헤드윅의 공연을 돕는데 대사는 거의 없다. 헤드윅은 내내 그를 짓궂게 대한다. 하지만 그녀도 묵묵히 자신을 돌봐주는 이츠학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걸 안다. 이츠학은 물리적으로 부각되는 부분은 적지만 입체적인 인물이다.
제이민도 '헤드윅'을 하게될줄 몰랐다. 제목은 익숙했지만 가깝지는 않았다. 지난해 출연한 뮤지컬 '인 더 하이츠' 이지나 연출의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 한마디가 발단이 됐다.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에서 이 연출의 생각과 별개로 오디션을 제안했다. 여자 뮤지컬 배우라면 한번쯤 욕심 낼 법한 '이츠학'역이지만 누구나 쉽게 도전할수 없는 인물이다. 상당한 고음을 요구해 웬만큼 가창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언감생심이다.
"준비를 해서 오디션에 갔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오디션을 보러 오셨다. 노래를 잘하는 아는 분들도 계시고. 거기서 어떻게 뽑혔는지 모르겠다."
목소리가 고운 제이민은 이츠학이 파워풀한 록 넘버를 소화해야 하는 만큼 "힘 없이 들리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했다. "그런데 노래할 때 중요한 것은 부러 오버하지 않는 거더라. 목이 상할 수도 있고. 최대한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안에서 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점차 익숙해진다. 조금씩 성장하는 느낌도 들고."
헤드윅이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이츠학이 솔로곡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부분이 있다. 이츠학을 맡은 배우들의 애창곡을 들려주는데 제이민은 예상치 못한 곡들을 기타 연주까지 곁들이며 서정적으로 선보여 호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날 그날 떠오르는 곡을 선곡한다. 헤드윅 선배님들에게 듣고 싶으신 곡을 신청 받기도 하고. 호호."
일본 니혼대 영화과를 나온 제이민은 지난해 8월 연세대 국제대학원을 졸업했다. 17세기 파리가 배경인 '삼총사', 19세기 런던인 배경인 '잭더리퍼', 뉴욕의 라틴할렘이라 통하는 워싱턴 하이츠가 배경인 '인 더 하이츠' 등 출연한 뮤지컬마다 해당 지역의 배경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인 이유다.
무조건 이츠학이 되려는 노력도 했다. "이츠학이 구박을 받으면서도 헤드윅을 사랑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꾸준히 사랑하는 점이 닮았다"고 부끄럽게 웃었다.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헤드윅이 불쌍해서, 측은해서 돌봐야 하는 책임감이 닮았다. 근데 이츠학처럼 그렇까지 구박을 당하고, 거부당하면서까지 사랑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고민이다."
이츠학은 그렇다면 헤드윅을 사랑하는 걸까. 제이민은 "회차를 거듭하면 할수록 복잡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헤드윅은 성소수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트렌스젠더이자 예술가였다. 이츠학이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존경심과 함께 사랑, 연민, 증오, 미움 등이 뒤범벅이 됐겠지. 외로움도 크고."
이츠학은 그래서 연기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했다. "초반에는 간단해 보였다. 캐릭터가 명료했지. 대사도 많지 않고, 연습 초반에는 행복했다. 호호. 근데 시간이 지날 수록 패닉에 빠지더라. 어느 날에는 공연 두 시간 전까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좀 더 이츠학을 확실하게 전하려고 회차를 거듭할수록 노력 중이다."
관객이 제이민의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날마다 입소문이 커지고 있다. 뮤지컬을 보러온 여성 팬들의 환심도 사고 있다. "마지막 앙코르가 끝나고 '제이민'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라. '지인이 왔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알아보니까 일반 관객분이었다. 너무 고마웠다. 새로운 얼굴이고, 체구가 마르고 작아 걱정이 많았는데 점차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생겨 힘이 난다."
헤드윅을 맡는 라인업은 쟁쟁하다. 조승우, 조성석 외에 'YB' 보컬 윤도현, 떠오르는 뮤지컬배우 정문성이 나눠 맡고 있다. 조만간 드라마 '미생' '육룡이 나르샤'의 스타 변요한도 출연한다.
제이민은 "아직 연기적인 부분으로는 멀었다"며 "'헤드윅'이 앞으로 내가 뮤지컬배우로 성장하는데 자양분이 되는 것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겸손해했다.
2007년 일본에서 먼저 데뷔한 제이민은 2012년 '잭더리퍼'의 '글로리아'로 뮤지컬에 데뷔한 이후 뮤지컬시장에 러브콜을 받고 있다. 아름답고 순수하지만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글로리아, 청순한 첫사랑의 이미지를 간직한 '삼총사'의 '콘스탄스', 새침하고 까칠하지만 사랑스러운 '인 더 하이츠'의 바네사 등 짧은 기간에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SM 아이돌이면 실력은 검증 받고 들어가는 추세다. 하지만 스타성과 이름값이 앞서 실력이 저평가가 되는 경향이 아직까지 짙다. 제이민 역시 그 중 한명이다.
제이민은 당찬 각오를 보였다. "내가 한 만큼 인정을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어떤 평가에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며 "지금은 더 쌓아갈 수밖에 없다. 10년 뒤에는 더 잘해야지라는 마음이 크다"고 눈을 빛냈다.
"뮤지컬배우가 될 것이라 생각도 못했는데 이젠 뮤지컬에 중독됐어요.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나는 뮤지컬에 출연하면 안 된다'고 자책도 했는데,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계속 드네요 호호~." 5월29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5만5000~9만9000원. 쇼노트·창작컴퍼니다. 02-749-9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