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철우 기자] 기자, 노동당원, 진중권 1호빠, 진보와 보수를 넘나든 한윤형 작가의 이력이다. 스스로는 온건보수라고 말한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저자이자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동했다. 잠시 숨 고르기 후 얼마 전 ‘상식의 독재’라는 책을 들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한국 사회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시도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답게 우리 사회 ‘담론’에 대한 성찰이 엿보인다. 한 작가를 만나 ‘상식의 독재’ 책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 대한 1983년생 MZ세대의 속내를 들어봤다.
책 제목 ‘상식의 독재’에서 말하는 ‘상식’이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어떤 규범 이런 것인가?
그 일상 용법을 당연히 포함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상식은 다른 나라에 비해 그 영역이 일단 넓다. 그리고 또 정치 언어가 되어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후보자 시절 공정과 상식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근데 이게 사실 국힘 진영에서 시작한 것이라기보다는 2000년대 초반 '최소한의 상식이 통하는 사회' 이런 식으로 민주진보진영에서 먼저 쓰인 바가 있었다. 이렇게 상식이란 말은 우리나라의 경우 다른 나라보다 여러 가지 규율이나 모두가 알아야 되는 지식을 넘어 윤리 의식과 같은 의미로 많이 쓰였다. 그게 정치권까지 확장되면서 정파적인 전유물이 됐고, 이제는 굉장히 편협한 상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 진영 상식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몰상식이라고 규정한다. 이렇게 상식의 독재를 욕망하는 몇 개의 당파가 싸우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그런 ‘상식’이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어떤 역할로 작동한다고 보는지?
소소하게는 ‘이걸 알아야 상식적인가요?’라고 커뮤니티에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맞다 아니다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른 사회 같으면 어떤 사람은 알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모르는,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하나의 기준 규율 그리고 어떤 공통의 감각이 전체 사회를 규율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나라는 지역 간, 계층 간 격차가 크다고 다들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이렇게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규율로 사회를 바라보는 게 마땅하다라고 믿는다. 그런 차원에서 상식의 독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공동체 사회는 다수가 동의하는 어떤 그런 기준에 의해서 작동하지 않나?
맞다. 상식이 정말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따를 것이니까 거기에 독재라는 말을 붙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한 당파가 말하는 상식이 다른 사람들한테 작동하지 않을 때 서로 상대방을 몰상식이라고 규탄하며 우리 편 상식이 전체 사회를 규율하고 저 몰상식한 사람들을 내쫓아야 된다고 믿고 욕망한다. 그리고 격렬하게 서로 싸운다. 나는 이렇게 모든 진영이 상식의 독재를 추구하는 상황이라고 본다.
그럼 말씀처럼 우리나라가 상식의 독재가 된 원인은 무엇인가?
흔히 정치 양극화를 얘기할 때 이념 과잉이 문제다는 식으로 진단하기가 쉽다. 근데 사실은 이념 과잉이 상식이란 말을 끌어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정말 이념 과잉이라면 탄탄한 논리에 기반해 왜 상대방을 그렇게 배격하는지 디테일한 설명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서로 싸우다 타협점이 제시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다들 기준이 매우 막연하다.
'친일파라서 안 돼', '종북주의라서 안 되'라는 데 기준이 매우 막연하다. 굉장히 강력하게 규율을 하고 있지만 체계적인 이념이 아니라 굉장히 느슨한 어떤 지식 체계의 영역일 뿐이다. 그러면서 상식이란 말로 네이밍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이 길어지면 ‘너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기냐?’며 면박을 준다. 혓바닥이 길다는 말은, 말이 긴 놈들은 뭔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은폐하고 있을 거다라고 판단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세상은 매우 단순하다. 올바른 게 뭔지도 뻔하고, 도덕이 뭔지도 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말이 길어지는 놈이 나쁜 놈이라고 보는 거다.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다.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선량한 마음과 올바름에 대한 것들이 모든 걸 규율할 수 있다고 믿는 이것이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탱해 왔다. 사람들이 실제로 다 비슷했으니까 그게 되게 편한 공유 방식이었다. 서로 간에 얼추 '사람이 말이야 이 정도는 살아야지'라고 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체계였다. 그런데 뉴미디어 시대에 와서는 정치적, 당파적으로 갈라져서 각자 보고 싶은 유튜브 채널을 보면서 자기 집단이 선의라는 것을 자기들만의 상식으로 공유한다. 문제는 서로 ‘상식’ 대 ‘상식’으로 싸우는 거라 아무리 논쟁을 해도, 무슨 가치 체계를 건드리거나 제대로 된 논거가 교환돼서 진전되지 않는다. 그냥 상대편 나쁜 놈 하다가 끝난다. 우리가 말하는 상식이라는 게 굉장히 느슨하고 소박하고 직관적인 체계이기 때문이다.
각 진영의 ‘상식’을 기준으로 상대는 공동체에서의 ‘일탈’로 본다는 의미인가?
한국은 하나의 상식만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와 지금처럼 격렬하게 분열하서도 타협을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당장 멸절시키려는 욕망이 크다. 이게 진리의 문제라면 진리에 대한 접근이 나와 다르구나라는 식으로 넘어 갈 수가 있는데, 지금처럼 '상식'이 돼버리면 나와 다른이는 일본이 돼버리고, 북한이 돼버린다. 요즘은 자기 진영을 좀 비판하는 사람을 내부 총질한다며 볼온시 하기까지 한다. 사실 비판도 할 수 있고 생각이 다르면 서로 맞춰볼 수도 있는데, 이견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내부 총질이라고 공격한다. 진영 간뿐 아니라 진영 내부적으로도 굉장히 획일화되고 황폐화됐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균형 있는 상식이 필요하다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좀 나아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우리나라가 너무 많은 걸 빠르게 배우고 다음으로 넘어가다 보니 긍정적인 유산들 조차 허접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많다. 가령 공고 시스템은 버려서는 안 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90년대에 대학이 늘어나면서 다 바꿔 버렸다. 또 암기 교육이 가졌던 장점도 일부분 있다는 분석들도 서구권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제 창의지성 교육으로 간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어떻게 갈지도 의문이다. 새로운 사조 따라 그때마다 갈아타면 이전 성취들은 쌓여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연차가 쌓였으니까 더 깊이가 있고 뿌리가 튼튼한 선진국으로 가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여기로 갔다가 저기로 갔다가 한다. 고도 성장기에는 그런 임기응변이 굉장히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해왔던 것이 어떤 지점에서 성공했고 어떤 지점에서 모자랐는가를 정확히 평가하고 그 평가위에서 다음 대책을 강구하는 습관을 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사회가 나아갈 나침반,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는 얘기인가?
담론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사실 이전 우리의 담론이라는 게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규명해 본 적이 없다. 제가 보기에 어떤 우리의 경험상에서 ‘한국은 완전 허접한 나라고 빨리 유럽이나 미국이나 일본에서 뭔가 들여와서 거기에 맞춰 개선해 나가야 된다’는 강박이 있다. 그런 습관이 들다 보니 한국의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를 분석을 안 한다. 분석을 한다고 하는데 대충 안다. 이런 식의 태도로는 담론이 제대로 기능 할 수 없다. 이념적인 존재로밖에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들이 어떤 지점에서 작동했고, 어떤 게 모자랐는지,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등에 대한 설계도가 필요하다. 제조업에 비교하자면 남의 설계도를 가져다 만드는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몸에 맞는 설계도를 이제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공정’이 한국사회의 중요한 화두인데 한 줄로 세우는 공정이 상식이 됐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게 한국의 우파 지식인들은 ‘한국 사람들은 너무 사회주의적이다’라고 비판 하고, 좌파 지식인들은 ‘너무 능력주의고 불평등이 체화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사실 둘 다가 있다고 본다. 어느 나라나 평등에 대한 지향도 일부 있고, 성과나 성취에 따라 불균등하게 인센티브가 배분되어야 된다는 생각도 분명히 있다. 문제는 저쪽에서 말하는 공정은 결국 불평등이 아니냐고도 해석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저쪽이 말하는 공정은 불평등이다라고만 말을 하게 되면 공정 담론에 개입할 길을 잃어버린다. 불균등 배분에도 공정성이 들어있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논란이나 수시, 정시 논쟁에서 보듯 능력주의 공정 담론이 굉장히 차별적인 부분도 있고, 또 진보 진영의 어떤 요구는 지나치게 성취에 대한 보상 개념이 없는 경우도 있다. 다만, 그렇게 상대방을 극단화시켜서 비판하기보다는 정책 차원으로 끌고 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정, 정의, 평등 감각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정책적 합의를 찾아보려는 시도를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상식의 독재’ 집필한 계기나, 고민은 무엇이었나?
정치평론으로 시작 했는데 한국의 근현대사까지 다루게 됐다. 결국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 이론이 됐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사회, 한국인의 어떤 특수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뒀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특수성이라는 게 보편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내가 말하는 특수성은 예외주의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한국인이 어디서 뚝 떨어진 독특하고 특별한 사람이어서 이렇다는 게 아니라 보편성의 좌표 사이에 어느 지점에 특수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를 알아야 어디로 가야하고, 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차원이다. 우리나라에도 특수성 담론이 90년대 초반에 잠깐 나왔다가 IMF 이후 사라졌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는 제가 10대라서 그 맥락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당시 특수성 담론은 일본을 따라 한 거라서 예외주의 담론이었다. 다른 나라에 없는 특성들을 조합해 일본 인상을 만들거나 미국 인상을 만들거나 하는데 그것은 제가 생각하는 특수성 구조가 아니다. 특성을 고려한다는 게 한국은 굉장히 특별하고 그래서 우리만의 길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게도 다 각각 있는 그 정도의 특수성 한국도 지니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차원에서 우리에게 맞는 대안을 찾아가자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