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한 서울 도심 속에서 고요히 방문객의 내면을 어루만져주는 성지(聖地). 서울 중구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박물관 건립 1주년 기념으로 중견조각가 오상일의 <구원의 노래>전을 열고 있다.
서소문 네거리밖 순교성지터에 건립된 이 박물관은 역사성 만큼이나 특별한 곳이다. 핫플레이스로 자리잡은 이곳은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지난주 일요일 하루에만 1100여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예술가의 외길을 묵묵히 걸으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50-60대 전업 중견작가를 후원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오상일 작가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생으로 전쟁과 피난, 이산을 경험하며 유목적 삶을 살아온 전후 세대의 조각가이다. <구원의 노래>라는 주제를 잡기까지 작가는 전시 공간의 성격과 일반인들에게 고통이 가중되는 코로나팬데믹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상 인체 조각을 근간으로 조각, 설치를 병행해온 그는 늘 작업에 서사 구조를 접목시켜왔다. 그의 서사는 현대성의 맥락 속에서 펼쳐지며 특히 현대 주체가 처한 어떤 모순과 부조리, 욕망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곤 했다.
“모든 인간 존재는 실존의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와 다름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가난, 질병, 증오, 불평등을 겪으면서 자유와 해방을 갈구하지요. ”
작품은 단테의 ‘신곡’과 존 밀턴(1608-1674)의 ‘실낙원’(失樂園)을 조각적으로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전시 내용 중에는 밀턴의 실낙원처럼 ‘실낙원’ ‘복낙원’이 있고, ‘심판’ 부분이 있다. 구조가 비슷한 밀턴의 ‘실낙원’을 보자.
‘실낙원’은 인간의 원죄와 구원의 가능성이라는 그리스도교적 내용을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걸작 서사시다. 성경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남녀인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대가로 낙원에서 추방되는 것이 테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쫒겨나기 전에 천사 라파엘을 보내어 앞으로의 인류의 역사를 환영으로 보여주고 구세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인류를 구원할 것임을 예언한다.
오상일 작가의 <구원의 노래> 전시 속 실낙원편을 보자.
아주 자그마한 섬 모양 위에 인간이 올라서있는 설치작품 40점이 눈에 띈다. 인간에게서 붉은 빛이 뿜어나온다. 자세히 보면 심장을 상징하는 LED전구가 심상 박동수를 따라 점멸한다. 태생적으로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조금 더 걸어가면 목을 멘 조형물이 보인다. 스승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에 비유한 ‘가리옷 유다’라는 조각품이다. 현세주의적인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다른 한쪽엔 ‘나무를 위한 레퀴엠’이 있다. 레퀴엠은 장송곡이다. 인간이 지닌 탐욕으로 파괴된 자연 생태와 오염된 환경 탓에 죽은 나무 토막들이 바닥에 시체처럼 누웠다. 죽은 나무로부터 생명의 정령이 흰 조각으로 빠져나와있고, 영상도 함께 보여진다.
하이라이트는 두 번째 섹션인 심판 시리즈다.
사람보다 더 큰 7명의 심판이 서 있다. 가슴에 로마숫자Ⅰ~Ⅶ가 표시돼있다. 이들은 입도 귀도 없이 무겁고 쾡한 표정으로 서있다.
이 심판들이 둘러싼 원탁 위에는 검은 넥타이에 검은 양복을 입은 아주 작은 사내가 긴장된 상태로 Ⅳ 심판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서 이들을 바라보는 날개달린 흰 천사도 있다.
심판들은 칠죄종을 각각 상징하며 심판한다. 칠죄종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탐식), 나태 등 인간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죄다.
작가는 “포기할 수 없는 ‘구원에 대한 희망’이 우리를 살아있게 해준다”면서 “심판받는 인간은 4번째 죄인 ‘분노’ 때문에 심판받고 있다. 제 자신일수도 있어서 오늘 작품 속 인물과 똑같이 블랙 의상을 입었다”고 말한다.
‘심판’ 시리즈를 지나면 마침내 '복낙원' 시리즈가 나타난다. 암울한 분위기에서 희망에 찬 밝은 분위기다. 세 마리의 백마가 보이고, 성모자(聖母子)를 상징하는 엄마와 아기, 천사와 식물이 ‘구원’을 암시한다.
작가는 타락한 현세의 모습과 타락 이전의 낙원을 나란히 병치시켜 극적 대비를 나타내고, 속죄와 구원의 거대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제목 '구원의 노래'는 작가 자신과 우리 모두의 구원을 향한 성찰의 몸짓인 셈이다.
지난 10일 오픈닝에서는 바로크바이올린 연주자 송은정씨와 중세음악을 연주하는 루티스트 윤현종씨(무지카 템푸스 음악감독)의 연주가 함께 해 참관객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이날 원종현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관장은 “많은 분들에게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사랑받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인사했고, 김영호 예술감독(중앙대 교수)는 “이 곳은 로마 바티칸에서도 인정하는 세계적인 성지로, 9년반에 걸쳐 박물관을 조성해준 관장님에게 감사한다”면서 오상일 작가를 소개했다. 이날 김복영 전 홍익대 교수와 정현 교수, 오원배 교수, 오상욱 교수, 박헌열 교수 등이 참여했다.
전시 관람 후에는 박물관에 상설전시되어 있는 오상일 작가의 조각품 ‘그리고 포옹하지 않았다’를 찾아보는 것도 또다른 재미를 준다. 전시는 12월 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