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위암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알려진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박테리아는 호주의 배리 마셜 박사와 로빈 워런 박사가 처음 발견해 2005년 노벨 생리의학생을 수상한 이후 최근까지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각종 소화기 질환 뿐만아니라 고혈압, 당뇨, 비만 등을 일으키는 대사질환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제균 치료로 위암 발생률 55% 감소
위 점막과 점액 사이에 기생하는 세균인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는 위염이나 기능성 소화불량증, 소화성궤양, 악성 위점막 림프종 등을 일으키고, 특히 암으로 되기 쉬운 위축성 위염과 장상피화생의 발생에 영향을 미쳐 위암 발병률을 높인다.
헬리코박터 독성인자는 사람의 면역반응이 강할 경우 약해지지만 면역력이 떨어지면 강해져 위암 같은 위장질환을 유발시키는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연세대학교 차정헌 교수 연구팀이 위암 원인균인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의 독성인자 수가 숙주의 면역 상태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을 규명해 냈다. 면역능력이 떨어지게 되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의 병인 인자 유전형이 병독성이 강한 방향으로 변화되며 이 변화 때문에 위암과 같은 심각한 위장질환 유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구강으로의 전염이 의심되고 있으나 감염경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인의 절반 정도가 보균자이지만 점차 감염 비율이 낮아지는 추세다. 현재는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찌개 등을 함께 먹는 식문화가 주요 감염 경로로 지목되기도 한다. 무증상인 경우가 많으며, 속쓰림이나 소화 장애 등이 있을 수 있다. 위내시경으로 위점막 조직 검사를 하면 가장 정확하고 신속하게 보균 여부를 진단할 수 있다. 이외에 주로 사용되는 진단법은 헬리코박터균이 독특한 발효물질을 생성하는 점을 이용한 호흡검사다. 헬리코박터균을 없애는 치료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위산분비억제제와 두 가지 이상의 항생제로 구성된 치료약을 1~2주 복용하는 방법으로 70~80%를 제균할 수 있다. 이후 검사를 통해 균이 남아 있다면 추가적인 제균 치료를 시행한다.
헬리코박터균을 없애는 치료를 하면 위암 발생 위험을 낮출 수 있다. 국립암센터 최일주 소화기내과 교수는 헬리코박터 제균 치료로 위암 발생률이 55% 감소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최 교수팀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부모 또는 형제·자매가 위암환자인 3100명의 가족 중 헬리코박터 양성인 1676명에게 제균약과 위약을 투여해 2018년까지 추적조사했다. 그 결과 제균약을 복용한 대상자 832명 중 위암이 발생한 사람은 1.2%인 10명이었다. 반면 위약 복용 대상자 844명 중 위암 발생자는 2.7%인 23명이었다. 특히 헬리코박터 제균에 성공한 대상자 608명 중에서는 0.8%인 5명만 위암이 발생해 낮은 수치를 보였다. 헬리코박터균에 지속적으로 감염돼있는 대상자 979명 중에는 28명(2.9%)이 위암에 걸렸다.
대사증후군 위험 높여
헬리코박터균은 위장질환 뿐만 아니라 당뇨, 이상지질혈증, 심혈관 질환 등 대사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김학령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순환기내과 교수 연구팀은 강북삼성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2만1251명을 대상으로 헬리코박터 위염의 중증도와 심혈관 질환 위험도 사이의 연관성을 분석한 결과 헬리코박터균 감염이 심근경색, 협심증 같은 심혈관 질환 발병 위험도 증가시킬 수 있음을 밝혔다.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나영 교수 연구팀은 전국 10개 대학병원 및 건강검진센터를 방문한 16세 이상 2만1106명을 대상으로 헬리코박터균 감염 여부를 파악하고 대사증후군 위험도를 조사했다. 소화기 질환 증상과 제균 치료 경험이 없는 1만5195명 중 43.2%(6569명)가 헬리코박터균에 감염된 것으로 파악됐다. 헬리코박터균 감염 그룹 중 대사증후군을 앓는 비율은 27.2%(1789명)로 감염되지 않은 그룹(21%·1809명)보다 높았다. 대사증후군에 영향을 미치는 성별·연령·체질량지수(BMI) 등을 보정한 결과 65세 미만의 경우 헬리코박터균의 감염은 대사증후군의 위험을 1.2배 높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65세 이상은 둘 사이에 연관성이 없었다.
또한, 김나영 교수 연구팀은 여성이 헬리코박터 제균 치료를 받으면 ‘좋은 콜레스테롤’로 불리는 HDL콜레스테롤 수치가 증가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콜레스테롤은 우리 몸의 세포막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 수치가 높아지면 혈관벽에 달라붙어 혈관을 좁아지게 만들고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등 심뇌혈관 질환 위험을 높인다. 하지만 모든 콜레스테롤이 심뇌혈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콜레스테롤은 저밀도(LDL)콜레스테롤, 고밀도(HDL)콜레스테롤, 중성지방 3가지로 나뉘는데 이 중 HDL콜레스테롤은 과다한 콜레스테롤을 간으로 보내고 혈관에 쌓인 플라크(침전물)를 청소해주는 이른바 ‘좋은 콜레스테롤’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LDL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고 혈액 속 지질, 지방 성분이 과다한 상태와 함께 HDL콜레스테롤이 낮은 상태도 ‘이상지질혈증’으로 분류한다.
연구팀은 분당서울대병원에서 헬리코박터 제균 치료를 받은 1521명 환자의 대사 인자를 2개월, 1년, 3년, 5년 단위로 추적 관찰한 결과 제균 치료를 받은 환자군 중 여성의 경우 치료 1년 후 HDL콜레스테롤 수치가 3.06mg/dl 증가했다. 여성 비제균 환자 그룹이 1년 후 5.78mg/dl 감소한 것과 큰 차이를 보였다. 반면 남성에서는 제균 치료 후에도 유의미한 HDL콜레스테롤 수치 증가가 관찰되지 않았다.
헬리코박터균의 제거로 고혈당 개선 효과도 확인됐다. 김나영 교수 연구팀은 헬리코박터균을 제거하면 혈중 포도당의 평균치를 추산할 수 있는 혈당 측정 지표인 당화혈색소 수치를 개선할 수 있음을 밝혔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를 제거하는 치료를 받은 환자군은 치료 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당화혈색소가 유의하게 감소하며 혈당 조절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헬리코박터 음성 환자군이나 제균 치료를 받지 않은 환자군은 당화혈색소 수치가 증가했다. 이런 집단 간 차이는 연구에서 제시한 최대 기간인 5년 후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녹내장과의 상관관계도 확인됐다. 서울의대 박기호, 김석환 교수, 성균관의대 김준모 교수팀은 한국인 122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 결과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가 녹내장의 위험을 높일 가능성이 제시됐다. 연구에 따르면 헬리코박터균이 양성으로 판명된 경우, 정상안압녹내장 빈도는 743명 중 76명인 10.2%였다. 음성으로 판명된 477명 중엔 28명으로 5.9%였다. 2배 정도 녹내장 위험이 높아지는 셈이다. 그러나 헬리코박터균 자체가 직접 녹내장을 유발하는지 균 감염 후 발생하는 2차 반응으로 발생하는지는 이번 연구를 통해 확인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