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이경숙 기자]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인 박슬기(30)와 이은원(25)은 그간 무럭무럭 자라났다. 몇 년 전만 해도 유망주로 꼽히던 이들이 어느새 국립발레단뿐 아니라 한국 발레계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 면에서 특히 그렇다. 2년 만에 돌아오는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3년 예술의전당 25주년 기념공연으로 예술의전당과 국립발레단이 공동 제작한 작품이다. 당시 '발레계의 블록버스터'로 불리며 92%의 티켓 판매율을 기록했다. 2014년 강수진(49) 예술감독 부임 첫해 첫번째 공연 작품이기도 하다. 국립발레단 단원들의 기량이 업그레이드됐다는 평가를 받는 데 한 몫을 한 공연으로 국립발레단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이국적인 인도 황금제국이 배경인 '라 바야데르'는 프랑스어로 회교사원의 무희를 뜻한다. 사원의 아름다운 무희 '니키아',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 전사 '솔로르', 무희에게서 전사를 빼앗으려는 공주 '감자티', 무희에게 욕망을 품은 최고 승려 '브라만', 이들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과 배신 이야기다.
2013년부터 니키아와 감자티를 번갈아가며 연기해온 박슬기와 이은원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기량뿐 아니라 캐릭터 해석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 세 번째로 니키아와 감자티를 번갈아 연기하게 된 박슬기와 이은원 모두 처음에는 두 역을 동시에 소화하는 것 만으로도 벅찼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한 해, 두해 지나자 캐릭터의 결이 보이기 시작했다.
"니키아는 감정 변화가 정말 다양하다. 절망했다가 좋아했다가 광기를 발산했다가. 변화 속도도 빠르다. 이전에는 이런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무희로만 얕게 표현했던 것 같은데 점차 그 깊이가 느껴지더라. 예전에는 니키아는 착한애, 감자티는 나쁜애, 이렇게 무조건 선악으로 나눴는데 무희임에도 공주인 감자티를 향해 칼을 꺼내드는 니키아의 다층적인 면을 발견해나가고 있다."(박슬기)
"경험이 쌓이다보니 니키아에 대해 점차 깨닫게 되더라. 이번에 외국 캐스트인 프리드먼 포겔과 호흡을 맞추면서 새롭고 성숙한 면을 찾아가고 있다."(이은원)
니키아는 발레 여성 캐릭터 중 가장 다채롭다. 1막에서는 사랑의 행복에 취한 관능적인 무희, 2막에서는 자신을 배신한 애인 앞에서 비통함을 감춘 채 행복을 기원하는 춤을 추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비련의 여인, 3막에서는 영혼이 돼 영원한 사랑을 지키는 신비한 망령이다. 마냥 순종적인 여성상이 아닌,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캐릭터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박슬기는 "여린 무희가 아닌 사랑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강인한 여성"이라고 해석했다.
감자티는 반면 니키아와 비교해 연기하기가 수월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 역시 감자티의 깊은 면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박슬기는 "알면알수록, 그렇지 않더라. 감자티에게도 슬프고 안타까운 모습이 있다. 그녀의 위치와 명성 때문에 악역으로 보일 수 있다. 살아온 환경에서 그런 면이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이은원도 "한 번도 부족함 없이 살아온 사람인데 니키아에게 사랑을 빼앗기니 그 부분에 대해서 연민이 들기도 했다"며 눈을 빛냈다. "어쩔 수 없이 독을 쓰는 장면이 있기는 한데 선천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니키아만큼 감자티도 중요한 캐릭터다.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에서는 감자티가 리드를 한다"고 해석했다.
두 역을 번갈아가며 연기하다 보니 두 캐릭터가 맞붙는 장면에서 에너지와 호흡 조절이 능수능란해졌다. 박슬기는 "두 캐릭터가 상반된다. 감자티가 에너지를 발산한다면 니키아는 에너지를 수렴한다. 공주인 감자티는 그 에너지를 더 강화시키고, 무희인 니키아는 그걸 수긍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니키아와 감자티를 같이 연기하니 상대 캐릭터의 성향과 심리가 더 이해되고 공감할 수밖에 없더라"고 확인했다.
박슬기와 이은원은 발레를 포함한 예술이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박슬기는 "눈치가 늘었다"며 웃었다. "액션이 있어야 리액션이 있다. 그런 부분이 점점 보이더라"며 "상대방이 어떤 상태인지 점점 캐치하게 되는 것 같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은원은 "항상 캐릭터 분석을 먼저 한다. 연구를 계속 해야 한다. 캐릭터의 입장을 이해 못하면 그런 표현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약에 내가 니키아 입장이라면 배신한 애인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니키아를 연기를 해야하니까 그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이해를 하는 척만 해서도 안 되더라"고 부연했다.
2007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뒤 군무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온 박슬기, 19세인 2010년 국립발레단에 들어와 초고속인 2년 만에 수석무용수가 된 이은원, 과정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발레단의 간판이다.
선이 고운 박슬기는 최근 화제를 모은 국립발레단 홍보 영상에서 현대적이면서 세련된 안무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이목구미가 뚜렷한 이은원은 표정이 인상적이라 팸플릿에 얼굴을 자주 내비치고 있다. 강 단장 부임 이후 관객과 좀 더 자연스런 소통이 이어지고 있는 국립발레단의 대중적인 이미지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부각된 이후 기계가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는 등 예술계에 디지털이 화두가 됐지만 사람이 몸을 써야만 하는 무용수들의 소명을 두 사람이 더 중시하는 이유다.
"물론 연출적인 면에서는 기계의 도움을 받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겠지. 하지만 사람의 움직임을 기계가 똑같이 따라한다고 해도 그 생명력에서 나오는 감동은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박슬기), "같은 작품, 같은 안무라고 해도 그날 그날 다르다. 무용수의 컨디션, 파트너의 상태, 관객의 분위기, 오케스트라의 음색, 군무단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라서 가능하다."(이은원)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는 1877년 마리우스 프티파가 안무한 작품을 1991년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볼쇼이발레단을 위해 재해석한 버전이 토대다. 2013년 국립발레단을 위해 수정 작업을 거쳐 재탄생했다. 당시 이탈리아 디자이너 루이자 스피나텔리가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했다.
이번 무대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포겔이 솔로르로 나서 이은원과 호흡을 맞춘다. 이영철, 정영재, 김기완, 이동훈도 같은 역을 번갈아 맡는다. 니키아는 이은원, 박슬기, 김리회, 김지영이다. 이은원, 박슬기와 함께 김리회도 감자티를 번갈아 연기한다. 또 다른 감자티는 신승원이다.
30일부터 4월3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예술감독 강수진, 지휘 주디스 얀, 연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5000~8만원(30일 문화가 있는날, 4월3일 KNB 해피아워로 1층 5만원·2층 3만원), 국립발레단. 02-587-6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