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설치작가 양혜규(49)의 작품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대규모 전시가 열렸다. 내년 2월 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에서 개최되는 전시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O2 & H2O>전이 그것이다.
현대자동차와 국립현대미술관이 국내 중진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2014년 시작한 10년 기획 프로젝트 <MMCA 현대차 시리즈>의 7회차 전시다. 매년 한사람의 작가를 선정해 대규모 개인전을 후원해온 ‘현대차 시리즈’에는 2014년 이불을 시작으로, 2015년 안규철, 2016년 김수자, 2017년 임흥순, 2018년 최정화, 2019년 박찬경의 개인전이 개최됐다. 작가 한 명만을 집중 조명하기 때문에 밀도 높은 관람을 제공하는 장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차의 중진작가 지원 프로젝트 일환
양혜규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이나 구체적인 일상의 환경 등을 설치, 조각, 영상, 사진,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교하고 추상적인 조형 언어로 재해석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2009년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된 후 국제 무대에 본격 이름을 알린 그는, 제16회 이스탄불 비엔날레(2019), 제21회 시드니 비엔날레(2018), 몬트리올 비엔날레(2016), 제12회 샤르자 비엔날레(2015), 제9회 타이베이 비엔날레(2014), 제13회 카셀 도쿠멘타(2012) 등 저명한 대형 국제 미술 전시에서 소개되었다.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독일의 볼프강 한 미술상(Wolfgang Hahn Prize)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양혜규: 손잡이들(Handles)>(11월 15일까지)을 비롯해, 온타리오 미술관 <양혜규: 창발(Emergence)>, 영국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Tate St Ives) <이상한 끌개(Strange Attractors)> 전을 순차적으로 연다.
현대차-국립현대미술관, 양혜규 대규모 개인전 열어
이번 전시에서는 ‘현실의 추상성'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생명 유지의 필수 요소인 산소(공기)와 물은 자연 상태에서는 물리적 현실이지만 인간이 고안한 화학기호에서는 ‘O2 ’,‘H2O’와 같이 특정하게 추상화된다. 전시 제목은 인간이 감각하는 경험의 추상적 성질을 미술 언어로 추적해온 작가의 관심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양혜규는 다양한 사회, 문화권에서 형성된 지식과 관습, 현상을 시각 언어로 표현한다.
방울과 인조 짚 등을 사용한 ‘소리나는 가물(家物)’은 생명체와 기계, 사물과 인간 사이 어느 지점을 가리킨다.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 다양한 문화권의 의례 행사에서 쓰이는 방울은 우주적인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다. 방울의 금속성 소리가 춤과 결합하면서 의례는 고양된 정신 상태에 도달한다. 4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소리나는 가물’은 일상적 물건인 다리미, 마우스, 헤어드라이어, 냄비의 생김새와 비슷하나 형태를 복제해 혼종 기물의 형태를 띤다. 조각을 움직이면 방울의 떨림으로 음향 효과가 난다.
높이 10m에 달하는 웅장한 블라인드 조각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은 시각적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블라인드 154개로 제작한 원통형의 구조물인 이 작품은 체험형 설치작품이다. 바닥에 입구와 출구가 적혀 있고 중심에 맞춰서면 관객은 앞으로 가로막히는 블라인드 체험을 하게 된다. 앞이 막혀 위를 쳐다보면 형광등이 소용돌이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작가는 미니멀리즘 대표 작가인 솔 르윗(1928~2007)의 작품을 재해석한 ‘솔 르윗 뒤집방기’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2015년부터 시작된 이 시리즈에 이번에는 순백색의 블라인드가 등장했다. 어느 방향으로 뒤집어도 모양이 바뀌지 않는 작가 자신의 원칙인 ‘뒤집기’를 다시 뒤집었다. 솔 르윗의 ‘구조물’(1994)과 ‘열린 모듈 입방체’(1966)는 각각 3배로 축소하고, 21배 확장한 구조물은 ‘크로마키 벽체 통로’의 위 꼭지점과 맞닿도록 만들어 마치 바닥에 직립한 듯 설치되어 있다.
또 정치적 선전물을 닮은 강렬한 그래픽과 과장된 타이포그래피로 점철된 다섯 점의 현수막이 풍선에 달려 복도 천장에 부유한다. ‘오행비행’의 다양한 이미지는 검정 파랑 빨강 노랑 흰색 등 오방색으로 물 나무 불 흙 철 등 5개 원소를 시각화한 것이다.
양혜규의 벽지 작업은 본인의 작품과 참조 오브제를 결합하는 콜라주에서 특정 장소에 연관된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작가가 '생산적 시대착오'라 부르는 붕괴된 시간성과 장소성은 ‘디엠지 비행’이라는 하나의 평면으로 압축된다. 복합적인 조감도는 비무장지대라는 특수한 장소성을 나타낸다.
‘진정성 있는 복제’는 남북 정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보도한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의 라이브 방송을 빗댄 작품이다. 몸통 없는 공명, 익명 개체의 존재감, 부재한 정체성 등을 '가짜 목소리'로 선사한다. 이 음성은 ‘오행비행’ 사이에 걸려있는 다각형 스피커 조합 ‘소리 열매’를 통해 송출된다. 소리에도 큰 의미를 두는 양혜규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복제해 만든 인공지능 목소리를 사용했다.
‘소리 나는 백설 어수선 불룩’은 다양한 크기의 방울이 불규칙적으로 부착되어 마치 화산 표면처럼 울퉁불퉁한 외형을 이룬다. 검고 짧은 봉은 마치 '소리 나는 조각'에 자주 등장하는 손잡이가 퇴화한 흔적 같다.
서울-베를린 기반, 세계 무대서 활약
양혜규는 서울대 조소과를 1994년 졸업하고 독일 국립미술학교 슈테델슐레에서 유학했다. 현재 모교인 슈테델슐레 교수로 재직하면서 서울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열정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는 인간의 관계, 사회적 양극화, 재해와 국경 등 무거운 주제를 복합적인 조각과 대형 설치 작품을 통해 사람과 사건, 현상을 포함하는 방대한 레퍼런스를 매력적으로 보여준다.
저서 ‘절대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생성하는 멜랑콜리’에서 ‘다치기 쉬운 감수성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용기’라고 밝혔던 작가는, 그의 철학대로 무거운 주제를 다루되 소재는 일상의 것들을 가져와 독특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한편 이번 전시 오디오 가이드는 배우 정우성이 재능 기부로 참여해 양혜규의 주요 작품을 설명한다. 전시와 함께 양혜규의 국내 첫 한국어 선집 '공기와 물: 양혜규에 관한 글모음 2001-2020'이 출간되었다. 지난 20년간의 작품 활동에 관한 국내외 미술계 필진의 글 36편을 연대순으로 엮은 책이다. 전시 관람을 위해서는 사전 예약이 필수다. 사전 예약자에 한해 2시간 단위로 250명씩 관람이 가능하다.
23일·내년 2월, 유명 전문가들 '라이브대담'
오는 23일과 2021년 2월에는 주한독일문화원과의 협업으로 두 차례 '라이브 대담'이 진행될 예정이다. 정도련 홍콩 M+ 부관장, 일마즈 지비오르(Yilmaz Dziewior)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 관장, 우테 메타 바우어(Ute Meta Bauer) 싱가포르 NTU현대미술센터 관장, 그리고 사회학자 김홍중(서울대학교 교수)이 참여한다.
전시 연계 공연으로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는 현대음악 그룹 소리퍼커션과 워크 인 프로그레스의 연주가 펼쳐진다. 미학자 양효실, 미술비평가 이진실, 미디어 역사문화연구자 이용우, 물리학자 김상욱의 강연, 작가 김진주, 양혜규의 대담으로 이루어진 ‘전시를 말하다’가 열린다.
공공프로그램으로는 편지를 매개로 미술관과 공공(public)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삼청로 30’, 양혜규 선집 ‘공기와 물’을 계기로 한 평론, 디자인, 출판에 관한 좌담회 ‘책과 미술’이 진행된다. 한편 의류 및 디자인 브랜드와 작가의 협업으로 주요 작품을 일상복과 액세서리로 재해석한 아트 상품도 출시됐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O2 & H2O>전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 온 양혜규의 첫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이라며, “3년 여 간 미술관과 협업해 만든 선집과 그동안의 작품 활동을 아우르는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외 관람객들이 양혜규의 작품세계를 탐색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전시장에 직접 가기 힘들다면 온라인으로 감상할 수도 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이지회 학예연구사가 작품을 설명하는 인스타그램이나 22일 오후 4시에 오픈되는 배우 정우성 목소리의 유투브 영상을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