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요”
9월 6~7일 코엑스 해외이민박람회 북새통 이뤄
지난
6∼7일 서울 코엑스 태평양홀에서‘해외이주·이민 박람회’가 열렸다. 이 박람회는 얼마전 모 홈쇼핑업체에서 선보인 캐나다 이민 상품이 연이어
대박을 터트리는 등 ‘이민’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개막된 행사라 많은 관심을 불러모았다.
행사 첫 날인 6일 박람회장은 오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입장하기 시작해, 장안은 어느새 넘쳐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자녀교육 위해 ‘유학’보다 ‘이민’ 선호
박람회장은 주변을 관람하는 사람들과 상담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이민열풍’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각 언론사 취재경쟁도 치열했다. 곳곳에서는
취재에 응대하는 이주업체 상담전문가와 이주 희망자들의 모습을 현장에 담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이 눈에 자주 띈다. 하지만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이주업체 관계자는 “최근의 이민열풍은 매스컴에서 자꾸 떠들어대니까 오히려 이민 희망자가 배가되고 있는 것”이라면서 “아무 관심이 없다가도
여기저기서 ‘이민열풍’이다 뭐다 하면 한 번 쯤 ‘혹’해지는 게 사람마음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매스컴의 영향이 군중심리를 자극해서 이민열풍을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관람객들은 각 부스마다 이주업체 전문가들과 직접 상담을 통해 이민 희망지역 정보는 물론, 이민수속, 영주권 취득, 법률상담, 이주후 정착서비스,
취업 등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정보를 얻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설명내용을 놓칠세라 상담자의 말에 경청하며 메모장에 받아 적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관람객들은 자신이 염두에 둔 국가의 이민 정보를 모으기 위해 각 이민관련 업체가 마련한 전단지를 꼼꼼히 챙기는 한편, 상담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 있기도 했다. “아이들 교육문제와 경제문제로 이민을 고려하고 있다”는 30대 후반의 한 직장남성은 “아직 정확한
결정을 하지 못해 충분히 상담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람회에서 만난 이민 희망자들은 비젼도 없는 한국에서 바둥거리며 사느니 차라리 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가족과
함께 박람회장을 찾은 김모씨(30대 후반 간호사)는 “남편(교사)과 함께 맞벌이를 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우리나라는 노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한국사회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열심히 일한 만큼 노후를 보장해 주는 미국으로 가 영주권을 따고 아이들(6세.
7세)에게 자유로운 교육도 받게 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특히 행사장에는 30대 젊은 부부들이 취학 전 자녀와 함께 이민 관련 상담을 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싶다는 주부 서모씨(35. 경기도 성남시)는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 이민을 생각하게 됐다”며 “5살과 3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더 크기
전에 해외에서 정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민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민을 계획중인 주부 노모씨(38·서울)도“아직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사교육비가 월 50만원 정도밖에 들지 않지만 앞으로 감당할 사교육비를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말했다. 역시 미국 이민을 계획하고
있는 한 젊은 주부는 “우리나라에서 급증하고 있는 유아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미국으로 취업이민을 가 사교육비를 줄이고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다”고 이민 이유를 밝혔다.
오전부터 점심도 거르고 상담을 계속해 오고 있다는 고려이주개발공사 김태선 주임은 “상담자 10명 중 9명은 자녀교육 때문에 이민을 계획하고
있고 대부분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서라도 자녀교육을 우선시했다”면서 “돈이 많이 드는 유학보다 영주권만 따면 돈도 적게 들고 많은 기회도
주어지기 때문에 유학보다 이민을 선호하는 경향”이라고 설명한다. 행사장 안의 분위기도 올 봄에 개최됐을 때와도 사뭇 다르다는 게 김 주임의
의견이다. 전에는 단순히 막연하게 생각해보고 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이민을 현실화시키고 정말 가야겠다는 분위기라는 것.
하지만 최근 이민열풍과 더불어 분위기에 휩쓸려 ‘남이 가니까 나도 간다’는 식으로 임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한다.
30~40대
직장인 고학력 중산층 이상 관심 높아
행사장 구석에서는 아예 털썩 주저앉아 돌아다니며 챙겨놓은 전단지를 정리하면서 상의를 하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행사장 한 켠
쉴 곳에는 어린 자녀와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주부들이 상담을 받고 올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행사를 후원한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대사관의 상담 테이블에도 비자 문제를 문의하는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참가 업체들이 마련한 세미나와 안내강연에도 70석의 자리가 꽉 매워질 정도로 관람객들이 들어찼고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몰려 이민열풍을 실감케
했다. 캐나다로 투자이민을 갈 예정인 김모(43.무역업)씨는 “국내 경기가 불황이어서 캐나다로 사업체를 옮기기로 결심했다”며 “국내보다는
미국과 가까운 캐나다가 사업여건이 좋다는 조언을 듣고 행사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박람회 참가업체 직원들은 밀려드는 고객과 상담하느라 식사도
거르는 등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모습을 보였다.
이번 박람회는 30~40대 직장인을 중심으로 고학력자, 중산층 이상이 많이 참석했다고 박람회 관계자는 말했다. 젊은층의 이민이 늘어난 것은
‘사오정(45세 정년)’과 ‘오륙도(56세 직장인은 도둑)’로 대변되는 불안정한 고용구조 등 “미래의 불투명성”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고려이주개발공사 김태선 주임은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스트레스는 늘어가면서 열심히 일해도 미래가 불투명해 한국사회에서는 더 이상의 비젼을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해 이처럼 젊은층의 이민자가 느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국전람 김문한 차장은 “40~50대에 새로운 일거리를 찾느니
20~30대에 해외에 나가 자영업을 하면서 기반을 잡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부인과 아이들을 먼저 외국에 보낸 “기러기 아빠”들도
이민 대열에 합류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틀간 1만5,000명 찾아
이민 희망국은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이 여전히 선호되고 있지만 최근에는 영어권 국가를 중심으로 다양화되고 있다고 한다. 행사를 개최한
한국전람 관계자는“상담자 대부분이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으로 경비가 덜 들고 조건없이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독립이민을 선호하고 있다”면서
“미국 캐나다 이민 희망자가 여전히 많지만 최근 뉴질랜드와 호주 쪽도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지금 당장 이민을 떠날 사람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관람객의 대부분이 계획을 갖고 최소 2~3년의 준비기간을 두고 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현재 고학력의 전문직을 갖고 있는 30대 후반의 한 부부는 “영어권의 인종차별 없고 적은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을
고려중”이라면서 “2∼3년간 꼼꼼이 알아보고 이민간 사람들 조언도 직접 듣고 이민갈 나라를 직접 현지답사도 해 볼 계획”이라고 말한다.
이번 이민박람회에는 6일과 7일 이틀간 1만5,000 여명 이상이 행사장을 찾아 장사진을 이뤘다. 지난 3월에 열린 박람회 관람객은 9500여
명으로 50% 이상 급증한 셈이다. 박람회를 주최한 한국전람㈜ 측은 “교육제도에 대한 불만과 사회·경제 불안으로 이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데다, 각국 주한 대사관들이 전략적으로 홍보에 나서 관람객 수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홍경희 기자 khhong04@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