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사건과 의문사 진상규명
1987년 어제,
민주항쟁 불당긴 박종철 사건
그냥 흘러가버렸을 수도 있을 역사였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힘없는 민초들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박종철 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말 한 번 잘못하기라도 할라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당하던 시기였다.
박씨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 씨의 소재를 알기 위한 참고인이라는 이유로 1987년 1월14일 하숙집에서
영장없이 불법으로 강제 연행됐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경찰은 조사받던 박씨가 자기 압박에 의해 충격사했다고 발표했다. 누가 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경찰의 발표였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부검의였던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 씨가 ‘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증언하면서 사건은 비로소 물 위로
떠올랐다.
경찰은 1월19일 박종철 씨 사망사건에 대한 재발표를 하면서 물고문 사실을 인정하고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등 2명이 고문에 가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결정적 사망 경위, 고문가담자의 수 등에 대한 의혹들을 남겨놓고 있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이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해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가담했음을 밝혀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8과장 황적준의
일기 증언에 따르면 강 치안본부장은 부검소견서를 ‘외상없음’으로 조작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들끓는 여론으로 말미암아 이 사건의 은폐·조작에
참여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사임하고, 다수의 경찰 간부가 구속됐다.
이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권의 부도덕성이 국민들을 분노케하면서 2·7추도회와 3·3대행진 등 국민적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위기를 느낀 정권은 4월13일 직선제 개헌에 대해 함구하라는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었다. 국민들은 더욱 더
분노했다. 분노는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 씨가 경찰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극에 달했다.
같은 달 26일 평화대행진에는 전국 180만여명의 국민이 거리로 몰려나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결국 사흘 후인 6월29일 당시 여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씨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2004년 오늘,
의문사진상규명 국회 등 비협조로 난항
박종철 씨 사건은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그 죽음은 묻혀버릴 수도 있었다.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바로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이 너무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5일 조사대상에 포함된 실종 사건 조사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의문사위가 현재 조사중인 실종 사건은
박태순 안치웅 노진수 심오석 정은복 탁은주 씨 사건 등 모두 6건이다. 대부분 70∼80년대 학생운동 등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돌연 실종된
사람들이다. 의문사위는 경찰이 문서사본은 물론 열람조차 거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모른다는 것과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다르다.
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기간 제한을 풀고, 일부 강제조사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소관상임위조차 정해지지 않은 채 한달 이상 표류하고 있다.
특히 이 법안이 표류되는 것은 애초 특별법 제정에 관여했던 법제사법위원회가 소관이 아니라며 국회의장에게 반려하면서 빚어진 것으로 책임
떠넘기기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의 잘못을 훌훌 털고 넘을 때 진정한 새 민주화시대를 열 수 있음을 우리 민초들만 역설하고 있으니 참 서글픈 현실이다.
김동옥 기자 aeiou@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