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사의 과거로 완전히 사라진 3김. |
3김은 한국 현대 정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들은 한국 정치의 희망이자 그늘이었다. 그 중 DJ와 YS ‘양김’은 민주화의
우상으로 추앙받는 동시에, 정치적 야욕을 위해 지역주의를 심화시켰다는 비난을 결코 면키 어렵다. 1987년 이후 JP까지 가세하면서 ‘3김’에
의한 지역주의는 뿌리깊게 고착됐다. 또한 이 시기 이후 한국의 정당은 1인 보스 사당화되면서 정치 발전의 후퇴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목적 위해 누구와도 합종연횡
DJ와 YS는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을 통해 본격적으로 라이벌 시대를 열었다. 당시 DJ는 YS를 누르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DJ는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박정희 1인 독재에 종지부를 찍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DJ는 90여만 표 차로 석패했다.
박정희 공화당의 ‘지역주의’를 이용한 선거전략 때문이었다.
지역주의는 박정희가 씨를 뿌리고 DJ와 YS가 정성껏 기른 결과 나타난 괴물이었다. 박정희는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영남지역에서 ‘호남인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영남인들은 불이익을 당한다’는 식으로 선동했다. 또 호남에는 ‘호남인이여 단결하라’고 적힌 삐라를 뿌려 마치 DJ의
행위인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영남민심을 더욱 자극했다. 결국 DJ는 다른 쪽에서 크게 이기고도 영남쪽 표를 흡수하지 못해 고배를 마셔야
했다.
YS와 DJ는 5공화국 시절 한 차례 손을 잡는다. 1984년 12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1대1 지분보장이라는 이면계약을 바탕으로
‘신한민주당’을 만든 것. 이후 양김은 직선제 쟁취를 위해 1987년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1대1 지분보장의 계약은 계속 유지됐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양김은 자신이 대선후보 적임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다 결국 DJ는 통일민주당을 박차고 나와 같은 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그 와중에 JP가 정계에 복귀, 충청권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영남, 호남, 충청을 기반으로 한 3김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에 대한 견제에만 몰두한 나머지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대통령직을 선물하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이후 YS는 다음 대권을 위해 1990년 1월22일 민정, 민주, 공화 3당 합당을 단행했다. 민주화 세력과 신군부, 그리고 유신세력이
뭉친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어쨌든 YS는 이를 발판으로 14대 대통령에 올랐고, 3번이나 대선에서 패배의 쓴맛을 본 DJ는 정계 은퇴했다.
그러나 DJ의 결심은 3년을 넘지 못했다. 그는 1995년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한편, YS가 그랬던 것처럼
1997년 11월3일 JP와 연합해 15대 대권을 거머쥐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지역주의를 선동하고 어떤 대상과도 전략적 제휴를 맺는 양김은 더 이상 민주화 우상이 아니었고 JP까지 포함, 3김은
청산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YS, DJ에 이어 4월19일 JP까지 완전 퇴장을 함으로써 한국정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3김 정치의 패단을 반면교사 삼아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정치가 거듭나길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