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생활근로자의 평균급여가 2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상황에서 3분의 1도 채 안되는 금액으로 한 달을 생활하고 있는 빈곤층은 우리 사회에서 해소해야 할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다.
부천시에 거주하는 K모(50세)씨는 고물장사로 20여년간을 생활했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지난 1997년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부인과 두 딸을 두고 있는 K씨의 가정은 전형적인 빈곤층이다.
수익 절반이 세금
K씨가 고물을 리어카로 실어날으면서 거둬들이는 수입은 한달에 10만원 정도.
부인 J모(42세)씨가 아파트 계단과 복도를 청소하는데 얻는 수익은 40만원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달부터는 복도청소를 빼고 계단만 청소하도록 돼 있어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에 수입은 오히려 10만원이 줄어들게 됐다. 여기에 정부가 보조해주는 19만원을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4인 가족의 총 수입은 60만원이 채 안된다.
그렇다고 이 자금을 모두 생활비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전기세와 관리비 핸드폰 요금 등 각종 세금으로 나가는 돈이 총 수입의 50%에 달하는 30만원이다. 한달 생활비로 지출할 수 있는 비용은 30만원. 그나마 정부에서 한달에 40㎏짜리 쌀 한가마니를 보내주고, 의료혜택을 받는 것이 위안이라고 말할 정도.
이 때문에 부인 J씨는 시장에 물건을 사러가는 게 일주일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사서 음식을 해먹는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
K씨 가정이 처음부터 기초생활 수급자로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생활이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살기 위해 붕어빵 장사와 고물장사 건설현장직 등 남들이 꺼리는 일을 마다하면서 많지 않은 돈이지만 남에게 손벌리고 생활하지는 않았다.
당시 거품인줄 모르고 소비가 활발히 이뤄졌던 1995년이 J씨가 기억하는 중산층에 가까운 생활을 했을 시기다. 당시 지인 A씨가 엿을 만들고 K씨는 시장에 내다 팔면서 월 200만원까지 벌었던 기억이 있다.
큰딸 심장병으로 기초수급자 돼
그러나 일이 꼬이더니 단단히 엮여 버렸다. A씨가 지방으로 이사가면서 엿 파는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고,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초등학교 2학년이던 큰딸이 심장병을 앓으면서 그동안 벌어온 돈을 모두 탕진해 기초생활수급자로 내려앉았다. 딸 수술비도 교회에서 도와줘 가능했다.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 “건설 현장을 가려해도 옛날에 다친 디스크로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고…” 외환위기를 전후해 정상적인 삶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됐다며 K씨는 한숨을 내쉈다.
외환위기 이후 K씨의 생활은 별 변화가 없다. 얼마 안돼는 돈이지만, 그동안 부업으로 생활에 보탬이 됐는데 그 마저도 끊어졌다.
다행히 지난 2000년 중동에 주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180만원의 임대료를 내고 임대아파트에 입주해 근근히 생활을 하고 있다.
작은 딸이 자기도 방 하나 갖고 싶다고 울고 하는데 그때가 가장 마음 아프다는 K씨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후 취업노력을 해봤지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경비와 회사 생산직에서 근무하려고 해도 번번히 낙방하고 말았다. 취업을 못한 것도 걱정이지만 하더라도 그 이후에 대한 대책이 없다.
취업을 하게되면 정부에서 지급되고 있는 보조금은 차치 하더라도 의료보험이 지역의료보험이로 변경이 불가피해 병원에서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방학 때마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큰딸의 병원비가 가장 큰 걱정이다.
K씨는 “통원치료를 할 경우 현재 1회에 1,000∼1,500원 정도만 내면 해결되는데 지역의료보험으로 바뀔 경우 이보다 10배 이상 지출이 발생한다고 들었다”며 “일자리도 없을 뿐 아니라 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줄어든 소득 어쩌나
취업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현재 지원되고 있는 19만원이 생활비에 턱없이 모자란다는게 K씨의 하소연이다.
“올 초 기초생활수급자 실질 수익을 조사하러 왔을 때 우리 집사람이 40만원을 신고했고, 나도 50만원 정도라고 했다”면서 “그러나 지난 8월 이후 생활이 더욱 어려워져 1주일에 한 번 고물상에 고물을 가져다 줄 정도로 빈곤해졌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29만원을 지원받으면 총 수익은 100만원이 넘었다. 하지만, 지원금액이 19만원으로 깎인 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K씨가 고물을 가져다 줄 때마다 받는 돈은 2∼3만원선. 결국 한 달에 10만원도 벌기 어려운 상황이다.
K씨는 “내 수입이 현저히 줄어 동사무소 직원에게 말을 했는데 ‘알았다’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어 갑갑하다”고 심정을 호소했다.
늘어나는 지출 대안 없어
최근 이런 K씨에게 또다른 걱정이 생겼다. 큰딸이 중3으로 당장 내년부터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하고 둘째 딸도 중2로 올라가 생활비 지출은 더욱 늘어나야 하는데 마땅한 대안이 없다.
K씨는 “큰딸이 가난한 형편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편이라 학교에서 중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어 인문고를 가고 싶어하는데 해 줄 수가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다행히 실업고에 진학하면 등록금은 국가에서 지원해주기 때문에 별 무리는 없지만, 딸 아이가 졸업을 함과 동시에 수급급여도 사라지게 돼 오히려 생활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요즘 전문대라도 나와야 취직을 한다던데 고등학교뿐이 안나온 얘가 어디 갈 때가 있겠나”라며 “나도 허리와 오른쪽 손이 정상이 아니어서 힘든 일도 할 수 없고 앞으로가 더욱 걱정”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K씨는 “이 추운 겨울에 그나마 이만한 임대아파트에라도 앉아 있어서 다행”이라며 “큰애가 ‘아빠, 내가 (심장병을 앓지 않았으면) 아니었으면 이 집도 없었을 껄’이라고 농담을 건넬 때 ‘그래 네가 효녀다’라고 얘기한다”며 한숨지었다..
신종명기자 skc113@sisa-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