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호(78) 회장은 박카스 신화와 국내 굴지의 제약업계의 대표적 오너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언론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에 그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면서 될 수 있는 한 모든 자료를 취합하려 했지만, 박카스 신화에 관한 것 빼고는 강 회장 본인에 대해서는 그 흔한 인터뷰나 토막뉴스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재계에서 소위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이나, 성공한 기업인이라면 한 번쯤 냈을 법한 자서전도 없었다.
동아제약 홍보실에서조차 이력사항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을 때는 ‘허탈’ 그 자체였다. 어렵사리 강 회장이 2년 전 동아제약 광고모델을 했던 한 학생과의 인연으로 진행된 인터뷰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걸어온 이력으로 그의 기업가 정신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의학의 길 접고 경영인으로 거듭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노장을 과시하는 강 회장은 천상 기업가다. 부친이 운영하던 10평 남짓한 의약품 상점을 국내 제약업계의 선두기업으로 키운 것은 순전히 그의 우직한 노력과 성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카스 신화’를 일구고 동아제약을 국내 제약업계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해 오고 있는 것도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 그의 꿈은 ‘의학교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대 의과대학과 대학원 내과를 마치고 3년간 병원에서 근무도 했고, 1956년에 독일 유학길에 올라 박사학위까지 받고 귀국했다. 그러나 창업주이신 姑 강중희 회장이 운영하던 ‘강중희 상점’(동아제약의 전신)이 일손이 달려 흑자부도가 나게 생겨 의학의 길을 접고 경영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이후 10평 남짓한 소규모 의약품 도매상이, 지금은 1967년 이후 줄곧 매출 및 R&D 분야 국내 제약업계 불변의 선두를 지켜온 기업으로 성장했다.
국내 손꼽히는 제약업계의 회장이지만, 권위나 자만심은 없다. 언론 노출을 기피한 것도 경영인은 제대로 경영만 하면 된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인터뷰니 뭐니해도 그게 종국엔 자기자랑이지.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누가 자기자랑 하는거 아닌가, 그래서 여기저기서 인터뷰하자고 졸라대면 본의 아니게 퇴짜를 놓았다”고 강 회장은 해명한다.
강 회장은 특별한 스케줄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원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다고 한다. 제약업체 오너답게 키 165cm에 체중 58kg을 수십년째 유지해 오는 것만 봐도 건강 관리 철저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동아제약이 매년 주최하는 공익성 이벤트 중 <대학생 국토대장정>에 매년 하루 정도는 학생들과 함께 행군의 선두에 설 정도의 열정도 있다.
‘창조인과 봉사인’
강신호 회장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박카스’다. 동아제약 입사 후 국내 약업사상 최장수 최대판매의 신화적 의약품인 자양강장제 박카스를 발매, 동아제약을 단숨에 한국 제약업계 부동의 1위 기업으로 만들었다. 지금도 매년 동아제약 매출액의 4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효자상품이다. 강신호 회장을 ‘박카스 신화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강 회장이 직접 박카스 이름과 제품을 직접 착안했고, 그만의 광고전략으로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제품을 부각시키려 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공익적 내용들과 인간애, 젊은이의 꿈과 열정을 담은 박카스 광고의 성공은 광고업계의 모범으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3M(mass production, mass
communication, mass sale) 마케팅은 대학강의의 텍스트가 되기도 했다.
동아제약의 사시(社是)는 ‘우리는 사회정의에 따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우수한 의약품을 생산하여 인류의 건강과 복지 향상에 이바지 한다’이다. 여기에는 강 회장의 인생철학과 기업관이 스며들어 있다. 창조와 봉사가 그것이다. 실제로 강 회장을 아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그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창조인과 봉사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강 회장은 2002년 4월 과학입국 건설과 신약개발의 공로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수훈했다. 창조장은 과학분야 훈장 중 최고훈장으로 강 회장이 최초의 수훈자다.
의약품 연구 및 개발을 위한 투자와 노력 외에도 강 회장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국내 산업기술계의 최고권위의 상인 ‘장영실상’과 기업의 기술개발 촉진을 위한 ‘신기술 인정’(KT마크)제도를 운용해 왔다. 신기술 개발의 동기와 자존심 부여를 위해 만든 이 두 제도에서 세계 최고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강 회장의 창조성은 그의 특기와 취미에서도 엿보인다. 다름 아닌 작명. 박카스는 물론 동아제약에서 개발된 거의 모든 제품의 이름이 강회장이 직접 지었다고 보면 된다고. 특허청에 등록된 것만 해도 무려 2,000여개에 달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기업윤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강 회장은 ‘봉사인’이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봉사활동도 열심이다.
진대제 현 정통부 장관도 가입한 ‘엔젤클럽’(서을대 학생들의 벤처창업 지원 모임), 초대 회장으로 선임된 1% 클럽(기업 이익의 1%이상을 사회공헌 활동에 활용하자는 취지로 창설)도 이 중 하나다. 또 1987년부터 수석문화재단이라는 장학재단을 설립해 지금까지 1,200여명에 이르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고, 의학계 학술발전을 위한 ‘동아의료저작상’과 약학연구 촉진을 위한 ‘약사금탑상’을 후원해 왔다.
강 회장은 지난 1975년 동아제약 사장을 거쳐 1981년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동종업계 최초의 KGMP 공장과 KGMP 연구소를 건립하는 등 우리나라 의약산업의 고속 성장과 선진화에 기여하며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연구개발 활동을 선도했다.
또한 동아제약의 경영을 통해 의약·생명공학 분야 과학기술 발전과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함과 동시에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이바지 했다. 특히 1992년 우리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민간연구소 설립사업’을 벌였다. 취임 당시 1,000여개에 불과한 기업연구소를 지난 10년간 10배 가까이 확대시키고 각종 기술혁신 촉진사업을 추진하는 등 정부와 민간산업 기술계와의 가교역할을 꾸준히 수행해 왔다.
경제활동 영역이 넓은 만큼 이력 또한 화려하다. 현재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비롯, 사회공헌 위원장,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장, 서울의대 공동회장 등 굵직한 것을 제외하고도 지금까지 썼거나 쓰고 있는 감투 수만 해도 무려 13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강신호 회장은 전 손길승 전경련 회장의 빈 자리를 2년여간 메꿔오다 수행기간 동안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이번에 우여곡절 끝에 재취임 됐다. 이제 30대 회장으로 선출된 강 회장이 재계의 갈등을 치유하고 구심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을지 기대가 모아진다.
홍경희 기자 metell@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