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온 정국이 떠들썩한 가운데, ‘도청’이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태풍의 핵이 되어 돌아왔다. 국정감사 때마다 ‘도청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정보통신부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정했지만 이는 현실로 드러났고, 심지어 DJ정부 시절부터 국가정보원에서 도청을 해 왔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도청의 기술이나 보급이 생각보다 훨씬 가깝게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증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도청을 막기 위한 대책들을 기업은 물론 개인까지 경쟁적으로 세우고 있다.
맘만 먹으면 뭐든 가능하다?
사생활 침해라는 측면에서 도·감청은 범죄 행위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불법 도·감청은 전혀 놀라울만한 일이 아니다. ‘맘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일반화 돼 있다. 정·재계·언론계는 물론 일반 개인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인터넷에 개설된 도청 관련 카페에서 도청 장비를 선전하는 광고가 버젓이 게재되고 있다. 도청장비 판매업자들은 인터넷 카페 연락처를 통해 문의 해오는 구매 희망자들을 서울 청계천의 세운상가 등으로 불러내 흥정을 벌인 뒤 목적에 맞는 도청장비를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청장비는 40만원대서부터 2,000만원대까지, 크기도 손톱만한 것에서 담뱃값만한 것까지 다양하다. 도청장비업자들 사이에서 복제 휴대전화를 통한 휴대전화 도청도 가능하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범죄의 온상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심부름센터는 ‘모종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도.감청을 활용한다는 것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상식이 됐다. 배우자의 불륜 사실을 확인해달라는 요청부터 주요사업 경쟁자의 정보를 캐내는 일까지 다양하게 이용한다. 심부름센터는 100만~300만원이면 상대방의 통화내역 조사와 차량 내 도청장치 설치까지 해 줄 수 있다고 선전한다.
도청을 활용한 범죄도 이미 일반인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 있다. 경찰은 올 들어 도청 등을 통한 개인생활 침해사범 59명을 적발했다. 도청 장치를 개인에게 판 경우가 많았고 견인 차량이 경찰이나 119구조대의 출동 지령을 도청한 경우도 있었다. 지난달 22일에는 청계천에서 구입한 도청 장비로 불륜 주부의 통화내용을 도청해 이를 미끼로 수 천 만원를 뜯어낸 일당 3명이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이처럼 대한민국이 사설도청에 무방비 상황으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경찰은 지난 5일 사설 불법 도.감청업체와 의뢰행위를 집중 단속하겠다고 나섰으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듯’ 도청 기술이 첨단화되고 지능화되고 있어 제대로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청 공포증 확산
도청에 대한 우려가 일반 시민들까지 확산되면서 ‘도청 공포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직장인 유 모씨는 최근 도청을 당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집에 걸려온 전화가 5초에 한 번 씩 삐~ 소리가 날 뿐 아무 소리가 나 지 않아 끊었는데 1분 후 똑같은 전화가 걸려왔다며 도청이 아닌지 의심한다.
도청 공포는 피해망상과 편집증 등 심각한 정신질환까지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주변의 사소한 움직임도 곧 도청의 징후로 판단하며, 휴대전화나 이메일의 스팸메시지도 도청자의 소행이라 의심한다. 심지어 혹시라도 집을 비우면 새로운 도청기가 설치될까 두려워 외출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한 두 차례 도청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도청공포증을 겪는 경우가 많다. 도청의 공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이들의 정상적 사회생활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도청방지전문업체 통신보안 관계자는 “도청기 제거를 의뢰해 오는 고객 중 도청 공포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30% 정도 된다”며 “이들은 휴대전화나 인터넷 등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대부분의 수단을 차단하면서 스스로 고립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도청탐지 전문업체에 따르면 안기부 X파일 사건 이후 도청탐지 가능성을 묻는 상담수가 2~3배 가량 늘었다. 예전엔 일반 기업체나 소송이 진행 중인 회사가 도청을 당하고 있는지 확인해 달라는 문의가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엔 일반 기업은 물론 사이가 좋지 않는 가족이나 친지, 연인들의 고객도 자주 찾는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도.감청 탐지 의뢰 급증
각종 도.감청 기기가 일반기업의 기술경쟁과 심부름센터의 사생활 조사에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기업과 개인차원이 대책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기업들은 임원급 회의나 입찰 등에 과한 프로젝트의 경우 사전점검 차원에서 도청장비 검색을 의뢰하는 것이 필수가 됐다. 영업기밀, 첨단정보 유출을 우려해 중요 회의나 대화를 할 때 ‘필담’(筆談)으로 하거나 회의가 끝나면 대화내용이 적힌 메모지를 파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경찰이나 기업체 임원, 연구원 등은 도청을 피하려고 공식적으로 쓰는 휴대폰 회에 1~2개 더 쓰기도 한다. 지난달 말 현재 국내 휴대전화 가입자는 모두 3,735만명으로 1인1폰 시대를 열고 있지만 불법 도청사건이 터진 뒤 1인2폰 시대도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최근 도.감청을 막아주는 상품의 판매량도 급증하고 있다. 전자상거래업체 옥션은 도.감청 방지 기기의 판매량이 최근 들어 3배 가량 늘어났다고 밝혔다. 열쇠고리형 도청감지기, 반경 5m안의 도청장치나 몰래카메라를 감지해주는 휴대형 은장도 등이 인기상품이다.
기업들은 기밀유출을 우려해 보안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 있다. 정보통신부가 최근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0년부터 지난 5월까지 사설 보안업체들이 불법 도.감청 탐지 의뢰건수는 모두 6,009건에 달한다. 현재 국내에는 13개의 도.감청 탐지업체가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등록허가를 받고 보안 서비스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