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여 임기동안 한·미FTA 타결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 특유의 고집과 뚝심, 의지가 빛을 발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한미FTA 협상의 속도를 보면 빨라도 이만저만 빠른 것이 아니다.
지난 2004년 11월 18일, 한미 통상장관회담에서 한미FTA 사전실무검토를 합의한 이래 참여정부는 2005년 의약품가격 인하조치중단 합의(10월 30일),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완화 합의(11월 19일), 쌀협상 국회비준동의안 강행처리(11월 23일), 2006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합의(1월 13일),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합의(1월 19일), 스크린쿼터 축소방침 발표(1월 26일), 한미FTA 협상 개시 기습발표(2월 3일), 한미FTA 예비협상 개시(3월 6일), 스크린쿼터 축소 국무회의 의결(3월 7일) 등 약 5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미FTA 체결을 위해 숨가쁜 일정을 밟아왔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대통령 훈령 제121조(FTA 절차 규정)에 명시된 공청회 개최규정을 무시한 채 각계각층의 자문도 없이 강행했다.
더구나 정부는 미국과의 한미FTA 1차 협상(6월 5일~9일)이 두 달여 남짓 남은 3월 23일에야 한미FTA 협상 전문가자문단을 공개 모집했고, 한 달여 남은 4월 27일에야 부랴부랴 한미FTA 협상 전문가자문단의 발족식을 가졌다. 다시 말해서, 한미FTA 협상 전문가자문단에게는 한미FTA 1차 협상을 준비할 시간이 한 달여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4월 11일에는 청와대의 지시로 대외경제연구소(KIEP)가 한미FTA 체결에 따른 GDP·무역수지 통계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폭로됐고, 6월 30일에는 국정홍보처가 운영 중인 ‘국정브리핑’ 사이트가 한미FTA 관련 인터뷰를 두 차례나 조작한 허위기사(6월 14일자)를 내보내 한미FTA에 관한 국민여론을 호도하려 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이 일지를 살펴보면 노무현 정부가 한미FTA를 추진하는 키워드가 읽힌다. 바로 ‘빨리’와 ‘대충’이다.
“과연 FTA를 맺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예측도 일본과의 FTA 경우는 한 100권의 연구가 있었습니다. 근데 현재 미국과의 FTA의 준비상태는, 공식적인 연구가 3권밖에 안돼요. 그 3권도 지극히 현실성이 의심스러운 결과가 나오고 있는…”(정태인, 全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이 말은 노무현 정부가 얼마나 한미FTA를 엉성하고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미국과 자본의 압력사면초가 참여정부 흔들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은 왜 무리를 두면서 까지 한미FTA를 추진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미국과 자본이라는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한다.
서울대학교 김세균 교수는 한미FTA를 다룬 ‘국민보고서’에서 “한미동맹 강화를 요구하는 정부 내부의 강력한 구조적 힘”을 한미FTA 추진의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또, 사면초가에 놓여있는 노무현 정권이 결국 자본과 타협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출발하면서 부터 지역주의와 양극화 해소라는 과제를 맡았던 참여정부. 그러나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내내 보수 기조를 보였으며, 신자유주의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참여정부가 양극화 해소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일은 부동산값을 잡는 일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빈부의 격차가 성장률의 둔화와 함께 정보기술의 발달로 교육수준에 따른 소득 격차로 인해 발생한다는 점을 보면 참여정부의 양극화 해소해법은 한참 헛다리를 짚은 셈이다.
이 같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에 국민들이 낙제점을 주자 일정한 개혁 의지를 지니고 있었던 노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른바 ‘대연정’을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보수세력의 거부로 망신을 자초한 뒤 내놓은 것이 한미FTA라는 것이다. 한신대 최형익 교수는 “노 대통령의 선택지는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사회경제정책을 변화시킬 사회진보적 정책을 도입하거나, 자본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들어줌으로써 이후 자본과의 정치협상에서 일정한 지분을 획득하는 방법 두 가지밖에 없었다”고 말한 뒤, “노 대통령은 후자의 노선을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미FTA =경제성장+양극화해소? 참여정부의 오판, 브레이크 없는 질주
한미FTA 추진 자체가 노무현 대통령의 승부수일 가능성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양극화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가지 숙제를 모두 풀기 위한 승부수로 한미FTA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과 양극화해소의 딜레마에서 지지율 하락을 자초한 노무현에게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사냥법이 마련되었으니 바로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동반성장 보고서)’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고의 보고서’라고 극찬한 이 보고서는 ‘서비스 산업을 집중 육성하여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고용을 통해 양극화를 완화하고, 내수 시장을 키워서 안정적인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의 성장에 따라 향후 한국의 제조업은 경쟁력이 상실될 것이므로 제조업에 있어서는 국가 간 분업 개념을 도입하고 한국은 물류, 금융 등에서 중국과 세계를 잇는 중간 역할의 서비스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동반성장 보고서의 논리는 한미FTA 추진에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한미 FTA에서 가장 관심 있는 것은 서비스업”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혔으며, 정부 자료에도 “한미 FTA가 경제성장과 양극화 해소의 방법”이라고 적어놨다.
문제는 “한미FTA는 한국의 희망”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신념이 완전한 오판에 가깝다는 것. 실제로 정부는 “한미FTA는 양극화 해소와 경제성장의 방법”이라고 되 뇌이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정부가 ‘산업고도화’, ‘경제체질개선’, ‘노사관계 선진화’와 같은 추상적인 긍정론을 펴는 동안, FTA반대진영 학자들은 조직적인 연구 작업과 적극적인 토론 참여로 정부 논리의 허점을 구체적으로 짚어냈으며 “미국과 똑같이 관세가 철폐되면 대미수입이 대미수출을 훨씬 초과할 것”이라면서 “이는 한국을 만성적인 대미적자의 늪에 빠뜨릴 수 있다”는 등의 논리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이들 FTA 반대학자들의 조직적인 연구가 이미 정부의 주장을 압도하고 국민여론을 반대로 이끌고 있지만, 문제는 청와대 내부에는 노 대통령의 오판을 바로 잡아줄 통로가 없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노무현 정부의 핵심적 사회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경제 관료들에 의해 완전히 주도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