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6개월 시한부 영업… 상인들 불안
“값싸고, 볼거리 많아 즐거운 곳”
과거 청계 2가에서부터 9가에 걸쳐 조성돼 있던 청계천 노점 시장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서울의 명물로 유명했다. 지난해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해체위기에 놓였던 노점은 다행히 현 동대문운동장으로 고스란히 옮겨와 풍물시장이란 이름으로 변모했다. 100년 만에 내린
3월 폭설이 서울과 중부지방을 뒤덮은 이후 때늦은 한파가 몰려온 지난 6일. 서울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는 동대문풍물시장(풍물시장)을
찾았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오전 11시30분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도 상인들은 주말 영업을 위해 부지런이 물건을 진열하고 있었다. 카세트, 건전지, 공구세트 등 가정에서
필요한 물품부터, 조선시대 사용했을 법한 주화와 몇 백 만원을 호가한다는 대동여전도, 60년대 만들어진 축음기와 레코드판, 286컴퓨터,
그밖에 의류와 스포츠 용품, 잡화 등 수 백가지 물품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풍물시장이 들어선 동대문운동장은 이미 중구청이 서울시로부터 임대해 견인차량 보관소로 이용하고 있고, 차량 200여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과 청계천 복원공사 기간동안 청계천 일대에 운행되고 있는 무료 셔틀버스의 종착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풍물시장은 이 운동장의 1/3
정도 면적에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가로 2m, 세로 1.2m 규격의 좌판을 제작해 영업을 하고 있다. 좌판과 좌판 사이는 거의 틈이 없었고, 좌판 앞
통로는 좌우 양방향 통행이 힘들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또한 차광 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비나 눈이 많이 오게되면 정상 영업을 할
수 없다.
풍물시장 4人공동대표인 권용희 씨는 “서울시가 지난해 11월 이전합의 당시 약속한 14개 사안 중 전기시설, 화장실, 상수도 등 기본적인
것은 해결됐지만, 차광막 설치, 상인 주차권 발부, 견인차량보관소 노점 허용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아직 진전이 없다”고 말했다.
풍물시장은 오전 10시에 문을 열어 해질녁까지 영업을 한다. 아직 좌판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어두워지면 장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시와의 협의에 따라 전기공사가 진행 중에 있어 조만간 야간 영업도 가능할 것이라는 게 관리 직원의 설명이다.
사람냄새 풍기는 시골 장터 풍경
오후 1시 중국, 홍콩 등에서 수입된 의류를 판매하는 상인은 취재를 요청하자 오히려 기자에게 영어로 써있는 상표 이름을 묻는데 열중이다.
빈폴, 폴로 등 대부분이 유사상품을 모방한 ‘짝퉁’ 제품으로 보였지만, 상인은 “인기상품”이라고 자랑한다.
골동품과 전자제품, 잡화들 사이로 ‘무조건 1,000원’이라는 글씨가 써있는 야채 좌판이 눈에 띄었다. 30대 중반의 노점 주인은 “친정아버지의
좌판을 물려받아 업종을 야채로 바꿔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풍물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시작했었는데 야채가 싱싱하고
값 싸다보니 입소문을 타 영업을 시작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단골손님이 꽤 많다”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러나 “물건이 많이
팔려도 값이 워낙 싸기 때문에 남는건 얼마 안돼, 장사 첫날에는 4,000원을 번 적도 있다”고 귀뜸했다.
야채가게 옆에서는 10대로 보이는 여학생이 색안경을 팔고 있었다. 수익의 50%가 자신의 몫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여학생의 장사
수완은 어른들 못지 않았다. 60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 손님에게 푸른색 컬러 안경을 권하며 가격을 흥정하는 소녀의 입담에 지나던 손님들
시선 집중되고 한바탕 웃음꽃을 피운다.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광경이다.
오후 5시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를 모시고 풍물시장을 찾았다”는 강석민 씨(33)는 “오랜만에 어머니가 오셔서 서울 구경을 시켜드리려고
보니 이곳 동대문 풍물시장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 모시고 왔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날씨는 조금 춥지만, 이곳에 오니 볼거리가 많아서
좋다고 말했다.
“오늘 장사는 공쳐도 내일은 팔리겠지”
오후 6시가 다가오면서 저녁바람이 더 차가워졌다. 상인들은 하나 둘씩 좌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장사도 안되고
춥고 해서 일찍 접는다”는 장난감 판매 상인은 “오늘 안 팔리면 내일은 팔리는 게 청계천 장사였다”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잊지 않았다.
옛날 시골에서 논농사에 쓰였던 쟁기며 호롱불, 숯다리미 등 골동품을 파는 50대 후반의 상인은 “아무도 사가지 않을 것 같지만, 이런
물건들은 카페나, 민속주점 등 가게에서 내부 디스플레이를 하기 위해 많이 찾는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워낙 경기가 좋지 않기 때문에 물건을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군용제품을 판매하는 70대 노상인은 “청계천에서 20년 넘게 노점을 해왔는데…”라며 “이제 생활도 그만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그의
말에서 청계천에 대한 짙은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어둠이 몰려오면서 먹거리를 파는 포장마차에 불이 들어왔다. 먹거리 상인들은 전기공사가 마련될 때까지 발전기를 이용해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상인들이 좌판을 정리할 무렵 풍물시장의 한쪽에서는 흥겨운 뽕짝 리듬과 함께 3~4명의 상인들이 일명 ‘관광버스’춤을 추고 있었다.
풍물시장에서 가방을 판매하는 상인은 “장사도 안되고 해서 술 한 잔하고 기분이 좋아서 춤도 춘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그렇게 장사가 잘될
때나 안될 때나 시장에서 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그들에게서 풍물시장은 생계의 터를 넘어서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곳이었다.
이런 풍물시장도 1년6개월 뒤에는 또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할 처지다. 서울시가 이곳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으로 한시적으로 영업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권 공동대표는 “풍물시장을 잘 개발한다면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는 관광명소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며 “서울시가 보다 긍정적인 측면서 풍물시장 발전 방안을 수립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skipio@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