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학교 지키는 ‘독수리 5학년’
책읽는 대학생 없다 오직 취업뿐
“저도 이렇게까지 하긴 싫었어요. 사회가 날 이렇게 까지 만든 것 같아 씁쓸합니다.”
97학번으로 서울소재 4년제 대학의 이공계열을 졸업한 이후 2002년 다시 연세대 국문과에 편입, 자신의 꿈을 키웠던 A씨(여 27).
올해 2월 졸업을 하고 5학년 대열에 들어선 그는 요즘 교육대학원 입학을 심각하게 고려중이다. “불안전한 사회에 교사란 직업은 그나마
좀 안전할 것 같아서”라는 것이 그 이유. 지금까지 150개 회사에 입사원서를 넣어 서류심사를 통과한 적은 단 두 번.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그에게 현실은 혹독했다.
2004년 새학기가 시작됐다. 04학번 새내기들을 맞은 캠퍼스는 겨우내 숨겨왔던 꽃망울을 터트리는 봉우리 마냥 싱그럽기만 하다. 그러나
고3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새내기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취업이라는 더 큰 산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일찍 깨닫는다.
학부제 실시이후 2학년에 올라가면서 원하는 학과에 들어가기 위한 1학년 학생들의 성적관리도 입시경쟁을 방불케 한다. 그만큼 대학사회가
치열한 경쟁구도로 흐르고 있다.
대학5년생 힘겨운 취업 전쟁
사상최악의 취업난 때문에 ‘대학5년생’으로 불리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대학5년생은 졸업을 앞두고 한 학기 휴학을 통해 졸업을
연기하거나, 졸업이후 취업을 하지 못한 학생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균관대 96학번 B씨도 대학 5년생으로 현재 학교 도서관에서 취업공부를 하고 있다. 군 제대 후 1년 휴학을 통해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와 올해 2월 졸업했다. 그러나 박 씨는 “졸업이 늦었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동기들 대부분이 자신과 같은
이유로 함께 졸업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취업이 안된 상태에서 도서관에서 후배들을 만나는 일은 부담스럽다”고 한다. 그래서 “고시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제외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5학년은 대부분 학교 도서관에 나가지 않는다고 졸업을 연기하는 5년생들이 늘어나자 일부 대학들은 이런 학생들을 위해 등록금을
신청한 학점만큼만 낼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고 있다. 또 졸업한 5학년생들이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하거나 출입증을 재발급
해준다.
서울 B대학의 경우 졸업생을 위해 학기별 선착순 200명에 한해 도서관 이용권을 발급한다. 단 2년 이내 졸업생만이 해당되며,
그나마 올해부터는 재학생의 이용이 낮은 오후 5시 이후 시간에만 이용이 가능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대학은 재학생을 가장해 도서관을
출입하는 졸업생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해외연수 기본, 공모전·인턴십 등 활발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취업에 필요한 성적관리와 자격증 획득, 어학 연수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대학생활의
코드가 취업에 맞춰져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해외 어학연수는 이제 선택보다는 필수라는 분위기다. 취업 현장에서는 “해외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오지 않은 것은 사람도 아니다”는 말이 심심지 않게 나오고 있다. 때문에 학생들의 해외연수 기회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각 기업체는 공모전 부상으로 해외연수 기회를 주기도 하고, 자치단체와 대학 역시 학생들에게 해외 연수 기회를 제공하는 사례도 부쩍
늘었다.
이에 따라 해외연수가 자칫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의 외화소비 부작용 등이 나타나고 있다. 취업 준비생 박모 씨는 주변 친구들을 보면
“연수를 원해서 가는 게 아니라 취업시 이력서에 한 줄 더 쓰기 위해 가는 학생들이 많아졌고, 후배 중에 한 명은 졸업 후 여러 기업에
이력서를 냈는데 번번이 실패하자 외국 연수를 떠났다”고 말했다. 도피성 연수로 비쳐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재학생을 대상으로 기업의 공모전과 인턴십 프로그램도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공모전의 경우 광고 카피나 자동차 디자인 등
대학생들의 참신한 아이템이 요구되는 분야로 삼성이나, SK 등 주요 기업에서 실시하는 편이며 인턴십의 경우 정부 정책으로 학점으로까지
인정된다. 그렇지만 “인턴사원으로 기업에 출근해 배울 일은 별로 없고 복사,” 커피심부름, 서류정리를 하는 것이 고작이라는 불만이 높다.
침체된 자치활동
이에 반해 대학의 캠퍼스에서 공동체문화는 급격히 퇴조하고 개인을 중심으로 한 끼리끼리 문화가 주류로 등장했다. 학생들의 자치 활동을 비롯해
동아리 활동 등이 침체기에 있다. 학생회는 1996년 학부제가 도입되면서 학생회 기초단위인 과학생회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부터다. 풀뿌리
학생회로 단위를 세우지 못하는 학생회도 있고 대부분의 학생회가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성균관대 99학번 강부원 씨는 “과 학생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학생들이 개인중심으로 학교생활을 하기 때문에 선·후배 사이에 인간적
모습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박재민 씨 역시 “학생회가 우리것 이라는 과거의 인식의 거의 사라져 대표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책 안읽는 대학생도 영어책은 본다
2월16일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 서점인 ‘논장’이 판매부진에 따른 자금만으로 문을 닫았다. 그동안 ‘논장’은 어려운 시장 여건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인문사회과학서점의 생존을 모색해 온 대학로의 명물로 이번 폐업은 출판계에 아쉬움을 남겼다.
지난 2000년 연세대 앞 ‘오늘의 책’ 폐업 이후 현재 서울시내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극소수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점들은 수익구조 면에서 인문사회과학서적 판매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20~30%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반해 취업에 필요한 토익 등 영어공부에 필요한 학원은 초만원이다. 매월 1일 토익학원과 어학원이 몰려있는 종로는 대학생들로 북적인다.
국민대 4학년 이모 씨는 “토익점수 올리기 위해 영어책 보는 시간도 모자라는데, 사회과학 서적을 누가 읽겠냐”고 반문한다.
이범수 기자 skipio@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