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청와대 인터넷 신문고 게시판에 자신을 지체장애 6급 생활보호대상자라 밝힌 박원구 씨가 참사랑을 실천하는 이라며 그이의 선행을 알리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1999년 서울 양재역 근처에서 걸음을 못 걷고 있는 박씨를 목적지까지 부축해주고 그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이. 박씨는 자기능력 안에서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라곤 미담을 알리는 것밖에 없다며 이평우(54) 씨를 소개했다.
지체장애1급인 아들을 위해
이씨는 만나자마자 박씨가 글을 올린 사실을 기자에게 전화 받고 알았다며 과연 자신이 그런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인터뷰를 해도 되는 건지 한참 고민했다고 말했다. 여전히 내키지는 않지만 만남에 응한 것은 장애인 문제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솔직히 저도 장애인 인권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도 부족했습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진 말이에요.”
그는 먼저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보다 아버지가 더 마음에 들어했다는 착하디 착한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두 아들, 두 아들 중 막내는 날 때부터 지체장애 1급이라는 ‘주홍글씨’가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처음엔 부인과 참 많이도 울었더랬다. 그러다 마냥 이러고 있을 순 없다며 기운을 차렸고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중 하나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변의 시선을 견뎌내며 아들을 자꾸만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다.
“남이 손가락질해도 이겨내야 한다며 더 자주 인파 속으로 들이밀었죠.”
다행히 아들은 용기 있게 버텼고 학교에 들어갈 무렵 죽어도 일반학교에 다니겠다고 고집부릴 정도로 자신과 그들을 똑같은 인격체로 인식했다.
“원래는 장애인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했는데 시설을 둘러보고 나니 저도 그곳에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더군요. 낙후된 시설이며 교육여건이 선진국에 비해 너무도 뒤떨어졌어요. 그때부터 장애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후원자가 아닌 친구로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급회장에 자진 출마, 당선까지 이루는 아들을 지켜보며 그는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됐고 그럼으로써 더 열심히 나누고 봉사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장애인을 비롯해 모자가정, 빈곤층 등을 후원하고 본업을 살려 집수리를 해줬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명동 성모병원 사거리에서 한 청년을 만났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껌 파는 청년이었다.
“3년전 겨울이었는데 길거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어요. 그런데 그이가 웃는 모습이 어찌나 해맑아 보이던지 너무 친해지고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나이를 넘어 둘은 친구가 됐고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인지 더 깊이 알게됐다. 힘겹게 모은 돈을 때리거나 사기쳐 뜯어가고, 자리를 비우면 그새 껌을 몽땅 훔쳐가는 ‘나쁜 놈’들이 세상에 너무도 많다는 것을.
“나라는 뭐하고 있는 건지 울분이 생겼습니다”며 격한 감정을 토로한 그는 “부디 청년과 박원구 씨 등 저와 인연을 맺고 있는 모든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됐음 좋겠다”고 소망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그는 청년이 무척 보고 싶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원자가 아닌 친구로, 그는 명동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