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의 부활을 꿈꾸며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 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1월12일은 우리의 통일운동진영에 있어서 큰 별이 진 날입니다. 바로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가 사망한지 꼭 10년이 됩니다.
위의 시는 문 목사가 쓴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일부분입니다. 정말 잠꼬대 같은 바람일까요?
하지만 머잖아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의선이 뚫리고, 개성공단에 남쪽 기업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서울이나 부산, 광주에
가서 평양행 차표를 살 수는 없지만 기업에 돈을 내면 금강산이나 평양도 갈 수가 있습니다.
문 목사가 1989년 3월25일 방북했을 당시만 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입니다. 유원호, 정경모 씨 등과 평양 땅을 밟은 그는 북에서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문 목사는 방북기간에 김일성 전 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4월2일에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과 ‘4·2 공동선언문’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2003년 12월19일 기독교회관에서 문익환 목사 10주기 행사추진위 발족식에서 이런 그의 활동을 두고 통일운동의 원로로 올해 97세가
되는 신창균 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명예의장은 “김구 선생의 통일 정신이 문익환에 전달됐고 김대중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지독히도 타협이란 것을 몰랐습니다. 여섯 번의 투옥이 이를 말해줍니다. ‘3·1민주구국선언’, ‘유신헌법비판’, ‘5·3인천항쟁’
등 그는 민중과 민족이 부르는 곳에 항상 있었습니다.
그의 손길은 통일운동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닙니다. 괴로워하는 노동자와 빈민, 청년 학생, 억압받는 지식인들에게도 어김없이 약손이 되어
어루만졌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그의 손길이 닿으면 병이 나았다고 말합니다. 전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대표를 지낸 배은심
씨는 문 목사를 회상하며 마음의 아픔을 치유해줬다고 고마워합니다.
배씨는 1988년 10월17일부터 이듬해 2월27일까지 기독교회관에서 135일 동안 전개된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장기 농성 당시 그곳을
찾은 문 목사를 잊지 못 합니다.
그는 기독교회관에 방문해서 일일이 농성단을 살피며 어디 아픈 데는 없나 살펴주었다고 합니다. 배씨에게는 손을 꼭 잡으시며 “무슨 사람이
이래, 그만큼 힘들었으면 아픈 구석이 있어야지 너무 건강하잖아”라고 농을 던지고, 헐헐 웃음으로 고단한 몸과 마음을 풀어주었습니다. 사기가루를
먹인 연실처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두려움에 휩싸였을 당시, 문 목사의 그 한마디가 어찌나 힘이 되던지 감사할 뿐이라더군요.
다시 돌아와서. 그러나 남북관계의 희망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반도는 평화가 깃들지 못 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북한은 핵을 둘러싸고
긴장상태로 몰아갑니다. 늦봄을 이은 6·15남북공동선언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원칙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볼모가 된 ‘평화’로 인해
미국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자주’와 ‘민족대단결’은 명맥만 남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먼저 추스러야 할 우리 안에서도 색깔과 이념의
대립이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늦봄은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통일연대 한상렬 공동대표는 늦봄이 그립다고 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민중을 아우르고 민족의
부활을 노래하던 그가 그립다고 합니다.
김동옥 기자 aeiou@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