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열차는 달리고 싶었다”
에이즈 편견 정부 기관 더 심해
지난 12월11일 새벽 서울에 사는 박모(28)씨는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상계백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초음파 검사결과 급성 맹장염으로
판명됐지만, 박씨는 병원측으로부터 수술을 거부당했다. 이유는 박씨가 HIV(선천성면역결핍증, 에이즈)보균자였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박씨는 13일 서울대병원에서 맹장 수술을 받았지만,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환자측은 “상계백병원과 서울대병원,
시촌세브란스병원 등 종합병원들이 환자가 에이즈 감염자라는 이유로 수술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상계백병원측은
“사후 처리를 할 수 있는 시설과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수술 경험이 없어 수술을 할 수가 없었다”며 궁색한 변명을 했다. 서울대병원과
신촌세브란스병원의 경우 수술을 거부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비난을 면하진 못했다. 한국에이즈퇴치연맹(회장 김정수 이하 에이즈연맹)
박주영 홍보부장은 “언론보도 때문에 환자가 무사히 수술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 에이즈연맹이 발표한 10대
뉴스 중 하나로 기록된 환자치료거부 사태는 에이즈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더욱이 질병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할 병원측이 환자 치료를 회피했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로 지적됐다.
편견에 가로막힌 산타열차
에이즈에 대한 정부기관의 무관심과 편견 또한 심각한 수준에 있다. 에이즈연맹이 기획했던 ‘산타열차’ 운행 무산 사태의 원인도 ‘무관심과
편견’에 있었다.
에이즈연맹은 지난해 12월1일 ‘에이즈의 날’을 맞아 에이즈에 대한 국민들의 잘못된 인식을 줄이고, 예방법을 알리고자 지하철 테마열차를
이용한 캠페인을 기획했었다.
지하철 문화열차는 수도권 시민의 발인 열차를 이용해 선정된 주제를 설치미술과 공연, 영상물 등으로 구성해 일정기간 운행하는 것으로 지난
2000년 8월부터 운행해왔다. 지금까지 도서열차, 디자인열차, 과학열차 등이 좋은 호응을 얻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운행될 예정이다.
에이즈연맹은 지하철 문화열차를 전문적으로 기획해온 KBS미디어와 계약을 통해 행사를 준비했다. 기획을 맡은 KBS미디어측에서는 산타열차
운행 기획안을 마련해 지하철 4호선 담당 기관인 철도청 산하 수도권전철운영단(단장 이하 운영단)에게 검토 의뢰했다. 그러나 운영단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불가’였다. 이유는 “지하철 이용객들의 정서에 에이즈가 상충한다”는 것이다. 이후 KBS미디어는 연맹과의 수위조절을 통해
1차 내용중 운영단이 지적한 에이즈와 관련된 부분을 대폭 삭제, 수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운영단은 이마저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실무를 담당한 KBS미디어의 정남수 PD는 “수도권전철운영단의 상급기관은 철도청의 인터넷 민원실에 수정된 기획안을 올리고, 행사취지를
설명해 보기도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운영단측은 “산타열차 기획당시 대구지하철사태 이후 전동차 내부를 불연재로 바꾸는 사업이 시행돼 내·외부 교체작업을 진행한 관계로
가용할 차량이 없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정 PD는 “차량이 없다는 이야기는 산타열차 기획이 무산된 이후에 운영단 실무자로부터 개인적인 대화도중에 확인한 것이지, 운영단이
처음부터 차량이 없다는 사실을 통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는 대구지하철사태가 발생한 지 10개월이 지난 상태였고, 수도권전철사업단은 대구지하철사태가 발생한지 채 2개월도 안된 지난 4월
문화열차 운행중단이 검토되고 있는 상태에서 ‘과학안전 문화열차’를 운행한 바 있다.
한편, 운영단은 KBS미디어측에 보낸 답변에서는 에이즈만 아니면 어떤 기획이든 협조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드러나,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할 국가기관이 되려 편견에 쌓여 있는 건 아닌가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정 PD는 “이번 사업을 진행하면서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편견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 모랐다”며 “사회 각 층의 자성이 필요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편, 에이즈연맹의 권관우 사무총장은 “에이즈에 대한 일반인들의 정서가 나쁜 것은 그 만큼 잘못된 상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산타열차와 같은 행사를 기획했는데, 정부기관인 철도청이 ‘일반인들의 정서’를 운운하면서 거부한 것은 잘못된 처사”라고
말했다. 권 총장은 “일반인들의 정서가 문제라기 보다는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층의 편견이 더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한 “최근
설문조사를 보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 환자와 악수만해도 병에 걸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제대로 알리지 못한 언론의 잘못도
있다고 말했다. 에이즈연맹 박주영 홍보부장은 콘돔이 방송용어로 부족하다는 이유로 공익광고를 하지 못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에이즈퇴치 연맹이 운행을 기회간 산타열차의 내부모습. 철도청의 주장대로 일반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 홍보 내용은 없었다. |
에이즈 설문조사 결과
그렇다면 에이즈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한국에이즈퇴치연맹과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병희 교수팀이 전국 성인 남녀 1955명을 대상으로
성행태 및 에이즈 의식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0%가 에이즈 감염인과 자신의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도록 허용 못한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의 48%는 ‘에이즈 감염인은 격리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42%는 ‘에이즈 치료 병원을 집 부근에 세우지 못한다’는 의견을 나타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에이즈에 관한 지식도 여전히 낮아 에이즈가
‘모기나 벌레에 물려 감염될 수 있다’(48.8%), ‘감염인과 물잔을 같이 사용하면 감염될 수 있다’(34.9%), ‘변기를 같이 사용하면
감염될 수 있다’(27.8%) 로 응답해 에이즈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따뜻한 시선이 목마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확인된 에이즈 환자가 2400명에 이른다. 이는 정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수치일 뿐 실제로는 에이즈 보균자까지 합하면
몇 배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주장이다. 그런데도 정부에서는 2400명이란 숫자가 적다는 불감증에 빠져있다. 정부는 에이즈
환자에 대해서 치료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다. 에이즈 환자에 대한 특별한 지원이자 관리다. 그러나 관리보다 더욱 중요한 예방에는 적극적이지
못하다. 에이즈는 질병이다. 확실한 치료방법이 없다는 것일 뿐 다른 병과 같은 질병이다. 그들도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일 뿐 천형을
받은 죄인 아니라는 것. 이러한 인식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데 정부와 사회 지도층의 역할이 절실하다.
이범수 기자 skipio@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