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의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일제하에 강제연행 당한 한국인은 750만명에 이른다. 문서상으로 밝혀진 것만도 80만명이 넘는다. 피해자들은 일본과 일본기업을 상대로 수차례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으나 승소한 적이 거의 없다. 1965년 6월22일 체결된 한일협정에서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게 일본측의 주장이었다.
이번 재판에서 원고측 변호를 맡은 김진국(42·법무법인 ‘내일’) 변호사를 통해 그간의 한일협정문서공개 추진과정과 이번 판결의 의미, 앞으로의 전망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문서공개 소송의 경과를 말해 달라.
2002년 9월5일 외교통상부에 공개처분신청을 냈다. 외통부가 그것을 거부하자 그해 10월 첫 소송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난 2월13일 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공개결정까지 1년 4개월이나 걸렸다.
외교통상부는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중공업 부산지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재판에서 지난해 4월 법원이 한일협정문서송부 요청을 했을 때도 받아들이지 않는 등 절대 공개불가 방침을 고수했었다.
공개되는 5개 문건은 어떤 것인가?
1965년 한일협정 때 ‘청구권협정’ ‘어업협정’ ‘재일교포 법적지위 및 대우에 관한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 4개 부속협정이 체결됐다. 이 가운데 청구권협정 부분만 공개되는 것이다. 전체가 공개됐으면 좋겠지만, 국가기밀과 관련된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일부만 공개키로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제6차 한일회담청구권 관계자료에 포함된 1963년 3월5일자 외무부의 ‘한일회담 일반청구권문제’ △속개 제6차 한일회담의 청구권위원회 회의록 및 경제협력 문제 △제7차 한일회담청구권관계회의 보고 및 훈령 2건 문서 △제7차 한일회담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내용 설명 및 자료 등이다.
문서공개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베일에 싸인 한일 현대사 규명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한일협정 관련 기록은 일체 비밀이었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의문점 중에 하나가 한일협정 과정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나 하는 것이다. 일본은 그간 공소시효 만료 또는 국가배상으로 이미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주장을 해왔다. 반면 한국정부는 외교적보호권만 포기한 것이지 개인청구권은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한일협정문서는 일본이나 일본기업에 대한 개인적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된 것인지 여부를 판단할 유력한 자료가 될 것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 진실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측 주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달라.
일본은 1965년 청구권협정 후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를 우리나라에 제공했다. 일본은 그간 그 돈의 성격을 보상적 성격이 아니라 경제협력 차원에서 제공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한국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주장대로라면 피해보상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다. 정신대 피해자 황금주(76) 할머니가 미국 워싱턴 D.C 연방지방법원에서 지난 2000년 9월18일 소송을 제기하면서 이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일본에서 소송을 할 때는 시효문제로 모두 졌다. 일본은 시효만료기간이 10년이다. 그러나 미국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시효를 두지 않는다. 일본으로서는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이때부터 입장을 바꿔 1965년 협정 당시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돈의 성격이 보상개념으로 바뀐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본이 문서를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일본은 아직까지도 한반도에 대한 강점을 불법적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문서가 공개돼 재판에서 피해소송원고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날 경우 강제징용과 불법노동임이 공식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자신들이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는 역사가 부당하고 불법적인 것이 되는 셈이다. 그게 두려운 것이다.
또 하나는 북일수교를 앞두고 한국과 했던 협상전략이 북한에 그대로 노출돼 일본에 불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은 외교적 타격을 이유로 1997년 1월 경 비공개 요청을 해온 적 있다.
한국정부가 문서공개를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원래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는 외교문서공개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공개하게 돼 있다. 그러나 외통부는 일본측이 부탁한 바도 있는데, 공개할 경우 국가적 신뢰가 크게 실추되는 등 국가이익에 배치되므로 정보공개법상 비공개대상 정보에 해당한다며 공개를 거부해 왔다. 일본에서 강제징용피해소송을 돕고 있는 현지 변호사들조차 한국정부의 태도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자국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가 “문서를 비공개함으로써 보호되는 국익은 피해자들의 이익을 희생시켜야 할 정도로 크지 않다”고 보고 정보를 공개하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앞으로의 전망은?
이번 문서공개 판결은 겨우 첫발을 내디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외교통상부가 항소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문서가 공개되면 그 내용을 확인하고 개인청구권 소멸여부에 따라 새로운 법률이론을 개발해서 대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