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겨울. 그 해 6월 미군장갑차에 짓눌려 처참히 쓰러져간 효순이 미선이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두 소녀를 추모하기 위해 불태웠던 수만의 촛불 또한 기억한다. 네티즌 ‘앙마’의 제안으로 시작된 촛불시위. 비록 소파(SOFA) 부딪혀 절반의 승리에 만족해야 했지만, 촛불시위의 시작은 곧 국민의 승리이고, 우리사회 곳곳에 썩어있는 부패와 반개혁 세력에 대한 네티즌의 경고였다.
2004년 1월,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사회전반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네티즌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친일인명사전발간을 위한 모금운동과 탤런트 이승연씨의 위안부 누드 영상물 제작 파문에 대한 네티즌 항의다.
“친일청산 정치권이 못하면 우리가 한다”
지난해 12월29일 국회 예결위 예산조정소위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추진되어 왔던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자료 조사에 책정된 예산 5억원 전액을 폐기했다. 이어 올 1월 임시국회 법사위에서는 ‘친일진상규명법’ 심의에서 한나라당 김용균, 심규철 의원과 정부의 반대로 법 제정이 무산됐다. 이 자리에 정부측 대표로 나온 김주현 행자부 차관은 “조사대상자 및 그 후손들이 강력 반발할 것으로 보여 국민적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반대 이유로 내세워, “친일파 후손이 무서워서 친일청산을 못하냐”는 네티즌들은 항의가 들끓기 시작했다.
국회의 예산 전액 삭감에 항의하는 네티즌 `참세상’의 제안에 따라 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와 한 인터넷신문이 공동으로 친일인명사전 발간성금 모금 캠페인이 시작됐다. 모금운동은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덕분에 운동 4일만에 모금액 1억원을 달성했고, 11일 만인 19일에는 목표액인 5억원에 이르는 등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사회각계 각층 참여 유도”
자발적 모금운동은 초고속인터넷 망을 타고 빠르게 확산돼 1월19일까지 2만2,000 여명의 네티즌이 모금에 참여했다. 이중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을 비롯해 허성관 행자부 장관 등 사회 각계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예산삭감에 반대했던 국회의원들까지 참여했다. ‘민족정기의원모임’이 주최가 되어 모인 여야의원 15명은 기자회견을 갖고 “네티즌의 친일인명사전 모금 캠페인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한 것. 이날 기자회견에는 한나라당에서 송광호·서상섭 의원, 민주당 설훈 의원이 참여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정동영 당의장을 비롯해 신기남·이부영·김정길·이미경 상임 중앙위원 등 당 최고지도부가 전원 참석했으며, 김희선·배기선·정세균·이종걸·최용규·김성호·임종석 의원도 참석했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당 의장은 “국회에서 친일인명 예산 5억원을 삭감시켰다는 것에 대해 의원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생각한다”면서 “의원들 가슴속에 비어있는 민족정기 정신을 대신해 네티즌들이 촛불시위를 만들었듯이, 이번에도 시민의 힘·시민의식을 보여준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어 설훈 민주당 의원은 “네티즌이 나서서 모금한다는 것이 국회의원으로서 부끄럽고 죄송하기 짝이 없다”면서 “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행자위 네티즌 항의에 꼬리내려
네티즌 모금운동이 확산되자 행정자치부는 민족문제연구소에 보낸 공문을 통해 ‘비합법적인 모금운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가 네티즌들의 항의가 거세자 곧바로 공문을 철회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민족문제연구소측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통한 역사적 진실규명을 위해 제출한 국민모금운동 허가 신청을 정부측이 받아들여 앞으로는 합법적인 모금운동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민족문제연구소는 2006년 12월 말까지 친일임명사전 발간에 필요한 예산 35억원 모금을 목표로 합법적인 모금운동을 벌일 수 있게됐다. 네티즌의 힘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사건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이번 모금운동의 의의는 네티즌들이 정치·사회문제만이 아닌, 역사인식의 영역으로 활동의 지평을 넓혔다는 데 있다”면서 앞으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네티즌의 힘으로’ 캠페인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민의 힘으로’라고 구호를 바꿔, 이번에 확인된 성금 모금 열기를 단순한 모금운동 차원을 넘어 실질적인 ‘역사정의실현 범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켜 나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역사정의실현의 열기는 더 나아가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까지 번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위안부 누드 영상집 네티즌 완승
네티즌의 위력은 이승연 위안부 누드 영상 파문에서도 나타났다.
지난달 12일 네티앙엔터테인먼트사와 탤런트 이승연 씨가 종군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누드 영상집을 제작,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서비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위안부 문제 관련단체와 여성 시민단체가 반발하고 나섰고 네티즌들 역시 위안부누드 안티 카페를 만들어 반대운동을 벌였다. 네티즌들은 오프라인에서 모여 네티앙엔터테인먼트사 항의방문을 비롯해 방송사 홈페이지에 이승연 방송퇴출을 요구하는 글을 조직적으로 올리는 등 누드집 제작을 막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사건 8일만에 기획사 책임자는 삭발을 하고 위안부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사과를 했고, 수 억원을 들여 만든 누드 영상집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이승연 역시 할머니들 앞에서 무릎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으며, 연예활동 중단이라는 연예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이번 누드파문의 경우 일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한 얄팍한 상술에 가슴아픈 민족사를 이용하려 했다는데 대한 네티즌들의 철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