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파괴하기 위한 충돌
변방연극제 참가하는 극단 끼판
“변방은 중심과 밖의 사이, 그 경계를 말한다. 이는 관점에 따라 ‘탈중심’이기도 하며 ‘최전방’이기도 하다. 변방연극제는 현 연극계의
주류에 기생하지 않으며 우리 문화의 밖만을 쫓지도 않는다. 이러한 경계는 연극을 새롭고, 실험적이며 자유롭게 한다.”
‘변방연극제’는 자기 존재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주류문화의 제도화 경향을 막기 위해서는 실험적 시도들을 복돋울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젊은 공연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것이 변방연극제이다.
변방연극제의 정신을 대변하는 ‘돌몸짓’
‘서울 공연예술가들의 모임’(회장 최치림 중앙대 교수, 한국연극학회장)이 엄선한 젊은 작가의 실험작을 선보이는 ‘변방예술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크다. 연극계가 타성에 젖지 않도록 자극제 역할을 할뿐아니라, 극장대여비가 없는 젊은 작가들에게 ‘무대’를 마련해 주는 장이
되기도 한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변방연극제’는 아룽구지 소극장과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16일까지 열린다. 정은경 연출의 ‘멍’, 부산연극제작소 동녘의
‘사랑, 첫 이미지’, 포스트 스튜디오의 ‘서곡’, 장애여성문화공동체 극단 끼판의 ‘돌몸짓’, 극단 다음사람의 ‘Holy Night’,
극단 문화창고의 ‘그들은 연극배우들이야’가 선정 작품이다.
이중에서도 ‘충돌을 향한 끝없는 여행’이라는 변방연극제의 슬로건에 꼭 맞는 작품이 있어 주목을 끈다. 극단 끼판의 ‘돌몸짓’이 그것이다.
‘돌몸짓’은 장애인 배우가 출연해 기존 의식에 메스를 가하는 작품이다. 장애여성이 금기를 깨고 문화활동의 주체가 된다는 것 자체가 주류
사회의식과 충돌을 일으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국적과 나이와 피부색깔 등의 경계를 파괴한다는 변방연극제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이번 연극제에 ‘돌몸짓’은 최고의 점수를 받고 뽑힌 작품이기도 하다.
“끼어들어
판벌이자”
‘끼판’은 지난해 7월 장애여성 이야기를 장애의 몸을 통해 스스로 이야기 해보자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끼판’이라는 이름은 정치적 색깔이
강하다는 것이 김미연 대표의 해석이다.
“사실 이 이름은 ‘끼어들어 판벌이자’라는 의미이다. 끼어들기는 ‘절대 끼어주지 않음’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끼어든다는 말에는 당당하게가
아닌, 무리해서 비집고 들어간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들어간 그 자리에서 주체가 되어, 끼어들었지만 중심이 되어버리는 뻔뻔함으로
아예 판을 벌이자는 것이 끼판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김미연 대표는 장애와 비장애, 여성과 남성, 정상과 비정상 등의 경계를 허무는 한판을 끼판이라고 말한다. 끼판은 주체와 객체가 따로 없이
모두가 어울어지는 축제인 것이다. 따라서, 장애인 배우가 존재하지만 장애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극단은 아니다. 앞으로 장애인과 무관한 내용의
작품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끼판은 우리 사회의 권위와 편견에 저항하는 문화 활동을 하는 것이지,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문화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의식은
있지만, 정치적 목적의 예술은 경계한다. 끼판의 두 번째 공동창작 작품인 ‘돌몸짓’은 소외 계층에 대한 시사적 문제제기를 넘어서, 독특한
공연예술 장르로 인정받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존재와
경계에 대한 근원적 성찰
‘돌몸짓’은 장애여성과 비장애여성의 본질적인 문제를 ‘알에서 깨어나는 새’의 몸짓으로 상징화시켜 표현한다. 장애와 비장애 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무수한 경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경계와 존재에 관한 철학적 성찰인 ‘돌몸짓’은 연습장면과 준비과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무대와
객석의 경계도 허문다.
연출가 오순한씨는 “변방연극제 이전의 ‘둘몸짓’이 장애여성의 삶의 질곡을 이미지적인 퍼포먼스로 단순히 그려냈다면, 이번 작품은 공연을 위해
노력하는 극단 끼판의 실제 상황을 무대로 가져왔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불합리를 관객이 직접 공유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장치이다.”고 밝혔다.
끼판의 공연에서는 실제 장애여성이 배우로 무대에 선다. 이 자체가 파격이다. 오순한씨도 ‘돌몸짓’을 맡기 전까지는 장애인이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장애인 연기조차 장애인이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만큼 사회적 ‘경계’가 견고하다고
할 수 있겠다. 김미연씨의 표현대로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세련된 차별’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장애인의 정체성 찾기
사회적으로 장애인이 문화의 주체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늘 대상화된 존재였던 만큼, 장애인의 모습은 대중문화 매체 속에서 왜곡되기 일쑤였다.
흉물스럽고 어두운 천민적 이미지에 무성의 존재로 통상 그려졌으며, 동정을 요하거나 비현실적인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장애인이 문화의 주체로 무대에 오르는 행위가 몸의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끼판의 작업들이 장애가
낯설지 않고 아름답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다고 본다. 실제로 장애인은 다양한 인격체들이며, 그중에는 끼가 넘치는 사람도 많다. 그들에게
문화 창조자의 기회를 부여하는 면에서도 의의가 크다.”
문화 소비자로서도 장애인은 소외되어 왔다. 변방연극제 공연장소인 문예회관 소극장도 장애인 관객을 맞이할 만한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김씨는 “문예회관 뿐아니라 모든 극장들이 애초부터 장애인 관객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변방연극제 참여는 끼판에게 소중한 결실이다. 무엇보다도 복지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던 끼판의 존재가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뜻깊다. 연극제를 앞두고 끼판의 식구들은 한층 고무된 분위기이다. 김씨는 오랜 숙원이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꿈꾸면 이루어진다. 정말 이루어지더라.” 김씨의 심경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이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