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만을 사랑할지어다… 그건 누가 정했는데?”
마쵸에 호모포비아인 기자, 제1회 동성애자인권캠프에 참가하다
‘2002 제1회 겨울 동성애자인권캠프’(1월18일~20일) 실무단으로부터 참가해도 좋다는 연락을 받은 게 캠프 이틀 전인 1월16일
늦은 9시가 넘어서였다. 동성애자인권연대(이하 동인련) 임태훈 대표는 동성애자의 사생활보호 문제가 걸리니 사진기자 없이 혼자 올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대신 사진은 동인련 측에서 찍은 것 중에서 주겠다고 했다. 전화를 받고 저녁식사를 하던 여자친구와 1시간 넘게 설전을 벌였다.
그녀는 내가 이번 캠프에 참가하는 것을 마뜩찮아 했다. 어쩌면 그 곳에서 “끔찍한” 동성애바이러스에 전염돼 오는 것은 아니냐고. 우선 그녀를
이해시켜야 했다. “전염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들은 성적 지향성이 다를 뿐이다”, “그들은 성적소수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갖은 편견과
멸시를 당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당장에 일반인들과 똑같은 수준의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라는
것이다”는 등 미리 읽어둔 자료에서 얻은 지식을 마치 내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마치 인권운동가가 된 것처럼 느꼈고
자랑스러웠다. 그래도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걱정하지마라, 자원봉사자로 참가해 그들을 지켜볼 뿐이니까”라며 안심시켰다.
‘일반’과 ‘이반’이 따로 없다
캠프 참가날 아침, 그러나 정작 나는 떨고 있었다. 감기 기운 탓은 분명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호모라 부르며 변태 취급했던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책을 통해 얻은 학술적 지식과 세상 일반 사람들의 편견을 씻어주리라는 직업적 사명감으로
녹아내리기를 바랐던 자체가 억지였던 것이다. 내 여자친구의 불안이 곧 나의 불안이었다.
캠프장에서 그들과 별도로 분류해주기를 바라며 임태훈 대표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임 대표는 나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함께 해야죠”. 그래서 결국 나는 3조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신은 나를 더욱 몰아세웠다. 사다리타기를 했는데 그만 조장이 되고만 것이다.
동성애자 캠프, 스스로 ‘이반’이라고 부르는 그들 틈에서 ‘일반’인 내가 조장이라. 앞이 캄캄했다.
점심식사 후 홍석천 씨의 커밍아웃 강의가 있었다. 흔히 홍 씨를 국내에서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한 최초의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현재 퀴어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동진 씨가 1호이다. 서 씨는 1994년 동성애자임을 알고 1996년 커밍아웃했다.
강의를 통해 홍석천 씨는 자신이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 몸으로 느낀 세상의 진리를 이야기했다. 홍 씨는 이 자리에서 동성애자임을 깨닫고 나아가
커밍아웃을 하더라도 일반들과 좋은 관계를 지속할 것을 주문했다. “나를 편하게 하는 것은 이반이다. 그러나 일반과 더 어울린다. 이반들끼리만
어울리고 테두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우리를 그냥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반들과도 어울리며 인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경험하고
사회적으로 성취하고 싶어했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커밍아웃을 못할 거야”
커밍아웃은 말하기처럼 쉽지가 않다. 벽장으로부터 나오다(Come out of the closet)라는 뜻의 커밍아웃은 성인식처럼 한 번
치르고 마는 행사가 아니다. 동성애자 스스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긍정하고 외부에 자신을 표출하는 그것은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부모,
형제, 친구들을 설득시켜 나가야 하며, 아직 동성애자를 에이즈의 전파자쯤으로 여기는 사회를 향해 “난 동성애자”라고 말해야 한다. 앞으로
평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 그래서 커밍아웃은 “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커밍아웃 중이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동성지향의 성정체성을 긍정하는 한 커밍아웃은 늘 무거운 등짐처럼 이들을 짓누른다.
밖에서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도 부모, 형제들에게는 거의 못하고 평생을 지내는 경우가 거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날 인권캠프에
참여했던 60여 명의 동성애자 가운데서도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한 경우는 10%도 채 되지 않았다. 이들은 형제에게는 그래도 할 수 있겠다고
말한다. ‘싸우고 지지고 볶다가’ 몇대 맞고 풀릴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서로 남남인 채로 살아갈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부모는 틀리다.
똑같이 열 달 간 배앓이를 해서 낳은 자식과의 연을 끊을 수도 없거니와 평생 ‘내가 무슨 전생의 원을 졌길래’라며 자식보다 더한 죄책감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랬다. “부모가 한 없는 아픔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커밍아웃을 못 할 거라고.”
세상의 시선은 이렇다
“넌 왜 정상적인 사랑을 못하니?” 프라이드 프로그램 중에 우둔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프라이드 프로그램은 동성애자로서 자존심을 가지고
자신이 살아왔던 삶과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는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다.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자신이 선택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질문을 받고 답하는 형식이었다. 실무단은 “주제를 대개의 동성애자들이 느꼈던 상황들이지만 서로 이야기가 부족했다고 생각되는
것들로 정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에 대한 주위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차별에 대한 불만이라던가, 과거 성 정체성으로 인해
가장 힘들었던 경험, 가상으로 자신이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할 때의 상황 역할 연기 등이 그것이다.
내 물음에 나이가 동갑이었던 친구는 되려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상적인 게 뭔데?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넌 그걸
어떻게 깨달았어? 태어날 때부터? 아니면 배워서? 내가 동성을 사랑하는 것도 똑같아. 너희들이 그걸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그래”
사실 이 질문이 동성애자들이 받는 가장 바보 같은 질문 베스트 5에 든다는 것을 2박 3일의 일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알았다.
“게이는 일회성 사랑을 즐긴다”에, “일반은 그렇지 않느냐?” 또 “게이는 여성스럽다”에,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여성스러움이 게이의
아이콘은 아니다. 모든 남성에게는 여성성이, 여성에게는 남성성이 내재해 있지 않은가?” 언제나 친절하게 되묻는 그의 질문 속에 답이 있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소수의 인권을 보장해주는 것”
이틀 째, 오완호 엠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은 ‘인권과 동성애’라는 강의를 통해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한국 인권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수보다 소외된 소수의 인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동성애자들은 더 열심히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오 국장은 또 우리 사회는 힘없는 소수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불심검문, 임의동행,
긴급체포 등 공권력을 빌려서 행하는 인권침해도 심각하지만 어릴 때부터 노래말을 통해 어린이들을 세뇌시키고 있다고 했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사람 조심하세요.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그에 따르면 이 노랫말은 보행자
중심이 아닌 차량 중심의 통행을 조장한다.
다른 두 개의 강의는 선택강의였다. 그 중에서 요즘 ‘엑스존’이라는 동성애자 사이트 청소년 유해판정이 이슈화되고 있는 만큼, 진보네트워크의
장여경 실장이 강의하는 ‘통신검열과 나’ 강의를 듣기로 정했다. 또 인권캠프를 참가했다고는 하지만 기사를 써야 되는 목적이 있는 만큼 가장
기본적인 ‘동성애 바로알기’ 강의도 듣기로 했다. 이 강의는 임태훈 동성애자인권연대 대표가 맡았다.
장 실장은 통신검열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는 “마녀사냥식으로 동성애 사이트이기 때문에 청소년에 유해하고, 폐쇄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정말 유해한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검열 주체의 권한이 올바른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며 “정부의 일방적인
인터넷 규제를 저지하고 대안적인 인터넷 규제 모델을 모색”할 것을 제안했다.
임 대표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성적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강의에 참석했던 동성애자들.
특히 대부분의 레즈비언 여성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이전까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잘 알지 못했거나 거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동성애를
병으로 생각하는 풍토에서 자란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대화할 상대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자살을 기도한 사람도 강의를 들은 25명 중에서 2명이나 있었다. 닫힌 성교육의 암담한 결과였다. 임 대표는 “성적 다양성에 대해 일찍부터
가르쳐야 한다. 홍석천이 커밍아웃 한 것에 대해 묻는 아이들에게 교사들은 답을 하지 못했거나 변태라고 말했거나 두 가지 경우였을 것이다”며
공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동성애자들이 받는 사회적 불평등
동성애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누려야 할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고 있는 고민
등에 대해 해결해 줄 창구가 전혀 없는 실정이다. 동인련에서는 그래서 ‘핫라인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자문 의료원과 변호사를 두어
에이즈에 대해 상담·교육하고 성정체성과 범죄 상담도 할 예정이다. 사회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던 사람들이 언제든지 쉬어갈 수 있게 쉼터도
마련하기로 했다.
캠프에 참가했던 어느 게이 커플은 여느 부부처럼 서로의 미래를 보장해주길 원했다. 자신이 사망 시에 배우자가 연금이나 보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지만 부부로 인정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망하더라도 같이 살았던 사람에게 친권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게 가능해지려면
결혼법뿐만 아니라 가족법, 노동법, 민법 등 관련 법률들을 수도 없이 뜯어 고쳐야 한다. 전세계적으로도 덴마크와 네덜란드가 유일하다. 한국은
그에 앞서 동성애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96년 트랜스젠더 강간사건 판결은 성추행으로 결말지어졌다. 이 판결에서 재판부는 사회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동성간 강간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여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았고, 강간의 객체를 부녀자로 한다고 하여 트랜스젠더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요즘 하리수 등이 등장하여 트랜스젠더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여자로 살기 위해서는 호적법의
개정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호모포비아”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우리는 동성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나. 나는 동성애자로서의 나 자신을 사랑하겠다. 하나. 나는 슬퍼하기 전에
행동하겠다. 하나. 나는 다른 모든 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겠다.”
마지막 날, 동성애자로서 받았던 억압과 편견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이렇게 행동하겠다는 프라이드 선언문을 조장의 신분으로 전체 앞에서 낭독하는
것으로 행사는 끝났다. 내 목소리는 첫날보다 떨림이 덜했다. 밤을 샌 뒤풀이와 게이·레즈비언 게임 등을 통해 그들의 끼스러움과 기갈떠는(동성애자들끼리의
은어, 끼스러움 보다 더한 본능적으로 드러나는 성향) 모습에 어쩌면 나는 반해버렸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조원들과의 롤링페이퍼에 그들과 다른 일반임을 강조하고 말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바보스러운 질문 다섯 가지
중 나머지를 옆에 앉은 친구에게 묻고 있었다. 그 중 한 가지 전염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히 깨달았지만, 아직 나는 동성애자에 비이성적인
호기심과 공포를 갖는 호모포비아였다.
“게이라는 걸 언제 알았어요?”, “성관계는 해봤어요?”….
동성애 운동 어떻게 자라났나히틀러와 스탈린의 집권은 동구권의 동성애 움직임을 압박했다. 동성애 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69년 6월에 일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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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옥 기자 aeiou@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