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슈퍼 히어로
매력적인 캐릭터, 화려한 액션 내세운 매끄러운 블록버스터 ‘스파이더 맨’
높은 빌딩숲 사이를 은밀하게 기어다니고, 손목에서 거미줄을 뽑아 고공을 나르며 악당을 처치하는 스파이더 맨은 60년대 이미 만화로 전세계
동심을 사로잡았던 영웅이다. 처음 마블사의 코믹북으로 출판되어 세계 500여종의 신문에 연재되고, TV, 만화, 영화 등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고 있는 작품.
스파이더 맨이 이토록 강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캐릭터의 깊은 매력에 있다. 외계 왕족의 혈통인 슈퍼맨이나 부유한 사업가 출신의
배트맨과는 달리 스파이더 맨은 평범하고 내성적인 고등학생이었을 뿐이다. 슈퍼맨이 선하고 완벽한 초인적 영웅상이었다면, 배트맨은 암울하고
비정한 반영웅상을 보여주었다. 스파이더 맨은 그 사이를 오가는 슈퍼 히어로의 면모를 보여준다.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주목
학교에서 늘 놀림받는 어리숙한 피터 파커는 우연히 유전자가 조작된 슈퍼 거미에 물린다. 그후, 피터는 거미줄 발사에 벽을 기어오를 수 있는
능력을 비롯, 위험을 감지하는 초감각과 괴력의 파워까지 소유하게 된다. 거미 같은 자신의 능력을 처음 깨달았을 때, 피터는 당황스러워 한다.
하지만, 10대답게 들뜨고, 짝사랑하던 메리 제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포츠카 구입에 초능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레슬링으로
현상금을 타기 위해 의상을 구상하는 피터. 스케치북에는 익히 알려진 스파이더 맨의 강렬한 의상이 그려지지만, 실제 피터가 입고 나온 의상은
엉성하고 유치한 티셔츠이다. 이같은 재치는 평범한 인간이 우연히 영웅이 되는 스파이더 맨의 사실적인 드라마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스파이더 맨’은 영웅 드라마보다는,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생긴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링 위의 피터는 영웅이라기 보다는 유아적인 모습이다. 현상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앙갚음으로 범죄를 모른
척 하는 행동 또한, 선하거나 정의로운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피터는 벤아저씨의 죽음을 계기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힘을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데 쓰기로 결심한다. 삶의 상처를 겪고 아동에서 성인이 되는 성장기 드라마의
핵심 모티브와 흡사하다. 이렇게 해서, 배트맨 보다 밝고 슈퍼맨보다 어두운, 다면적인 휴머니스트 스파이더 맨이 탄생한다.
샘 레이미 감독 특유의 스타일은 잠잠
스파이더 맨은 여느 영웅과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삶을 산다. 자신의 모습을 찍어 언론사에 파는 사진기자와 초인적 영웅의 삶을 동시에 꾸려간다.
적수로 나오는 그린 고블린 또한 피터의 절친한 친구 해리의 아버지이자 과학자로, 한편으로는 파괴를 일삼는 악의 화신으로 살아가는 다중적인
인물이다. 그린 고블린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거울 앞에서 자신과 대화하는 장면은, 영웅과 악당, 평범과 비범,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잘 보여준다. 대치하는 적이 일상에서 애증관계에 놓여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영화로서만 가질 수 있는 ‘스파이더 맨’의 매력은, 화려한 액션과 스피드, 시각효과이다. 토비 맥과이어의 유연하고 섬세한 몸짓과
빌딩숲을 누비는 액션씬은 남성적이기 보다는 우아하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 스파이더 맨 매니아들은 평면 만화가 동영상으로 재현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클 것이다.
스파이더 맨을 맡은 토비 맥과이어와 연인 메리 제인을 맡은 크리스틴 던스트의 캐스팅은 빛난다. 특히, 그린 고글린으로 분한 윌리엄 데포의
뛰어난 연기는 역시 인상적이다. 단지, ‘이블데드’ 같은 샘 레이미 감독의 재기발랄한 B급 스타일을 특별히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코믹북은 샘 레이미의 영역인데도,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인지 특유의 비주류적인 미학과 독특한 유머는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개봉 전부터 나돌았던
속편 제작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확신할 수 있다. 후편도 애증관계의 적과 대치할 듯하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