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기 K리그에서 계속된다
관중없이 썰렁했던 축구장은 옛말… 개막전에만 12만 구름관중
‘월드컵 열기가 국내축구로 이어질까?’ 그것은
기우였다. 지난 달 30일 터키와의 3~4위전이 열렸던 대구월드컵경기장에 새겼던 ‘CU@K리그’의 약속을 국민은 지켰다. 7월7일 2002
프로축구 개막전 4경기에는 12만 명의 구름관중이 몰렸다. 공식 집계는 12만3,189명. 지난 99년 5경기가 열렸던 정규리그 개막전
9만9,326명의 기록을 3년 만에 갈아치웠다. 이 기록은 95년 4월1일 아디다스컵대회 4경기 10만1,124명보다도 2만여 명이 많다.
10대 소녀팬서 가족중심으로
프로축구가 이런 영화를 누린 적이 있었던가? 98년 프랑스월드컵 직후 대단한 축구붐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이동국, 고종수, 안정환 등 신세대 스타 3인방을 보려는 10대 소녀관중이 경기장으로 몰렸다. 관중수는 200만을 훌쩍 넘겼다.
그러나 거품이었다. 소녀들의 열정은 이태를 넘기지 못했다. 그 후 바로 프로축구 침체기.
이번에는 다르다. 축구장을 찾은 사람들에게서 성별, 연령 등을 따질 이유가 없었다. 대부분 가족단위로 입장해 어린아이, 노인, 특수계층이라
불리는 아줌마까지 연고팀 승리를 갈망하는 응원의 함성을 보탰다.
관중의 증가는 월드컵 때 함께 했던 응원의 참맛에 매료된 바 컸다.
성남일화와 포항스틸러스의 경기가 열린 성남종합경기장. 2만9,000여 명의 관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찼다. 정세희(43) 씨는 남편과
자녀 두 명을 데리고 경기장을 찾았다. “축구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는 그녀는 “아직도 월드컵 때 한국을 응원했던 그 함성이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고 말했다. 정 씨는 “와서 보니 더 재미있다”며 “꾸준히 찾을 것”을 장담했다.
성남 경기가 있을 때는 빼놓지 않고 축구장을 찾았다는 ‘골수 축구팬’ 준수(13). 이번에는 증조할아버지까지 가족 4대 18명에게 바람을
넣어 축구장으로 이끌고 왔다. “어른들이 그런 데를 가서 뭐하냐고 하셨었는데, 이번에는 언제 개막하냐면서 함께 가자고 하셨어요.”
준수는 이날 성남이 한 골을 리드당하고 있어도 응원을 멈추지 않으며 마냥 즐거워했다. “꼭 골을 넣고 이길 거예요. 또 지면 어때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잖아요.” 결국 성남은 후반 10분을 남기고 두골을 연거푸 집어넣어 3대2로 역전승. 준수에게 더 없는 기쁨을 선사했다.
서포터즈, “초라했던 시절은 안녕”
각 프로축구팀의 서포터즈 회원수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간 ‘소수정예’라며 자위를 했던 서포터즈들. 지금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수원삼성의 ‘그랑블루’가 회원 1만여 명으로 가장 많았지만 그 외의 팀들은 포항 ‘스틸러스’가 1,500여 명, 성남 ‘천마불사’가 300여명,
전남의 ‘위너드래곤즈’가 500여 명 수준에 불과했다.
개막전이 다가오면서 많은 시민들이 서포터즈에 가입의사를 밝혀왔다. 각팀 서포터즈들은 회원이 최소 2배 이상은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천마불사’는 벌써 월드컵 이후에 150명이 가입했고, 경기일이었던 7일에도 현장에서 50명이 추가 가입했다. “홈경기 때도 30여 명을
넘지 않았던 서포터즈의 초라했던 시절은 이제 끝”이라며 조성환(20) 씨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각팀 서포터즈의 게시판에는 응원할 때 입을 유니폼 구입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그랑블루’의 경우 구단과 협의해 공동구매했으나 수량이
모자라 애를 먹고 있다. 직접 확인하고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사이즈가 맞지 않아 반환 요청이 들어오기도 한다. 회원의 급증으로 인한 ‘행복한
부작용’이긴 하지만 프로야구팀의 경우처럼 구단에서 운영하는 스포츠샵이 부럽다.
“편하고 즐겁게 경기장을 찾게 해야”
어떻게 하면 이 열기를 시즌 내내 가져갈 수 있을까? “구단에서 이제껏 해왔듯이 자동차를 경품으로 내걸거나 연예인들을 불러 공연하는 방법으로
팬을 모으려고 해서는 안 돼요. 일시적으로는 호응이 좋을 수 있지만, 축구자체를 사랑해서 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시 그 기반은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천마불사’ 회원 강성원(20) 씨는 물질적인 유혹보다 ‘팬사인회’ 등 “선수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그런 자리야말로 팀에 대한 자긍심과 소속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포항스틸러스를 응원하기 위해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스틸러스’ 회원 김문식(23) 씨는 “선수들의 얼굴과 뛰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이 우리 서포터즈”라며 패배의 쓰린 속을 달래고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는 “팬들이 편하고 즐겁게 연습장이든 경기장이든 찾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구단이 첫째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첫승! 16강! 8강! 그리고 4강 신화 그곳엔 K리그가 있었습니다.’ 성남종합경기장 네 모퉁이에 걸린 축구협회의 플래카드. K리그는
있었다. 그러나 관중 없는 K리그였다. 이 플래카드는 관중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자화상을 떠올리게 했다. 4년 후에도 이런 플래카드가 걸린다면
떳떳이 쳐다볼 수 있길 관중들은 다짐하고 있다.
김동옥 기자 aeiou@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