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첩 수라상에 담긴 철학과 문화
중요무형문화재 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황혜성
“궁중음식은 전통음식 중 가장 잘 다듬어진
최고의 음식이며, 단순히 사치스럽거나 좋은 것이 아니라 식품의 가짓수가 다양하고 최상품을 썼다는 것, 조리법과 음식의 조합, 재료의 배합이
대단히 이상적이라는 데 가치가 있다”
궁중음식은 전통음식의 결정판이자, 왕조의 역사와 사상이 담겨있는 전통문화의 정수이다. 궁중음식의 연구와 체계화에 일생을 쏟았던 황혜성 선생(82)이
궁중음식의 세계화 대중화에 남다른 사명감을 느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음식은 당대 철학과 문화의 산물”이라는 선생은 궁중음식을 통해 전통문화의
진정한 ‘맛’을 널리 알렸다.
마지막 주방상궁을 스승으로 만나
부잣집 고명딸로 태어난 선생은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업은엄마, 젖엄마, 까까엄마 등 선생을 극진하게 보살피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일제시대 선생은 교토여자대학 가사과에서 일본음식과 서구식 영양학을 배웠다. 정작 집안에서 음식을 배울 기회는 없었고, 전통음식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김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뭘로 하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궁중음식과의 운명적 만남은 선생이 22세에 숙명여전조교수로 임용된 첫날에 찾아왔다. 일본인 교장은 선생에게 “조선 요리를 가르치지요”라고
권유했다. 일본식으로 성을 갈고, 조선말을 해도 잡혀갔던 일제시대. 망한 왕조의 음식은 잊혀져가던 상황이었다. 뜻밖의 요청에 당황한 선생에게
교장은 창덕궁 낙선재를 소개했다.
마지막 왕비인 순종황후 윤비가 거처하던 낙선재에는 고종, 순종을 모셨던 궁중 나인 4명이 남아 낙선재 소주방(燒廚房)을 맡고 있었다. 선생은
그 중 가장 고참인 한희순 상궁을 스승으로 삼고 매달렸다. “명맥만 유지하던 왕실이지만, 서릿발같은 기품은 당당하고 대단했다”고 선생은
당시를 회상한다. 궁인들은 냉정했다. 음식 만드는 과정에 선생은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선생은 알아듣지도 못할 궁중말을 되묻지도 못하고
눈동냥 귀동냥으로 기록하고 나름대로 계량화했다.
몇 달이 지나자 선생의 정성에 한상궁도 마음을 열었다. 왕조체제가 무너지고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상궁은 정릉의 인수재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왕조의 쇠락을 실감한 한상궁은 궁중음식의 전수에 더욱 열의를 보였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주방상궁이었던 한상궁은 궁중음식 외에도 왕조의 생생한
역사를 선생에게 전해주었다. 선생은 저녁마다 두 딸을 데리고 가 한상궁에게 전통음식을 배웠다. 두 딸은 공책에 요리과정을 글로 적고 그림을
그려 순서대로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스물두살에 어머니를 여읜 선생은 스물셋에 연이 닿은 한상궁을 거의 매일 만나며 못다한 모녀지간의
정을 나누었다.
대중화, 세계화를 목표로
60년대부터 각 분야의 전통문화를 발굴 계승하기 위한 문화재 지정작업이 시행되었다. 선생은 궁중음식을 중요무형문화재로 만들기 위해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음식은 아무 여자나 하는 일인데 무슨 특별한 일이라고 문화재가 된단 말입니까?”라며 번번이 거절당했다. 1969년 12월
문화재 지정을 위한 회의가 있던 날 선생은 한상궁과 함께 갖은 음식을 장만했다. 두텁떡, 약과, 유과, 정과 등을 만들어 회의실에 가져갔다.
직접 맛을 본 위원들은 궁중음식을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했다. 궁중음식의 가치를 인정받은 이날, 선생과 한상궁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로부터 1년 후 한상궁이 타계했다. 스승의 타계로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생은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많이 알리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국빈 상차림과 텔레비전 요리 강좌 등으로 궁중음식 대중화에 앞장섰던 선생은 71년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
본격적인 연구와 전수를 시작했다. 현재 흔히 볼 수 있는 구절판도 선생이 복원해서 대중화시킨 요리 중 하나다. 각종 강연회와 함께 ‘한국의
요리’ ‘전통의 맛’ ‘조선왕조 궁중음식’ ‘우리음식 백가지’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며 전통음식 집대성에도 힘을 쏟았다. 한편, 아들
한용규씨는 궁중음식전문점 ‘지화자’를 열어 전통음식의 상품화 세계화의 터전을 닦았다.
세딸들도 모두 궁중음식의 계승자가 되었다. 첫째딸 한복려씨는 궁중음식연구원장과 전통병과교육원장을 맡고 있으며, 둘째딸 한복선씨는 요리학원을
세워 전통요리의 보급과 현대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셋째딸 한복진씨 또한 전통음식 전문가이다.
‘황혜성가의 식문화’로 불리는 선생의 가족은 국제화시대에 걸맞는 전통음식의 새로운 방향을 활발히 모색중이다. 음식과 관련한 예식, 교육,
정보자료, 박물관, 떡과 과자의 개발 등 한국 음식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발전시키는 것이 공동목표다. 선생은 “세 딸들이 모두 내 뒤를
이어, 내가 미처 못다한 기록을 체계화하고 정리하여 전통음식문화를 세계적인 문화로 올려놓겠다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흡족해했다.
”순수했기 때문에 당당했다”
마지막 상궁에게서 궁중음식 조리법을 전수받아 그것으로 학문적 기초를 만들기까지는 수많은 실패가 따랐다. 되와 홉, 말을 킬로그램과 큰술,
작은술로 바꾸는 일은 전혀 선례가 없던 일이었다. 더구나 궁중요리는 어상에서부터 수라상 등 종류와 식단의 수가 방대했다.
선생은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 일을 해냈다. 전통음식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선생은 규장각으로 종묘로 궁중음식의 근원을 찾아다녔다.
방학이면 배낭 하나를 둘러메고 알려지지 않은 전통음식의 원형을 찾아 전국방방곡곡을 누볐다. 1965년 경북대학교 논문집에서 조선시대 숙종
연간에 안동 장씨 부인이 요리책을 냈다는 사실을 발견한 선생은 안동이씨 종택까지 찾아가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란 책의 원본을 발견해내기도
했다. 비싼 음식 재료를 대느라 늘 가난에 허덕였던 선생은 하지만, “순수했기 때문에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다”고 말한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자연의 맛이 전통음식의 매력인 것처럼, 순수한 열정이야말로 선생의 업적을 빛내는 원동력이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