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만화책의 무한한 상상력
유럽 언더만화의 현주소 보여주는 ‘벼룩만화 총서’
손바닥만한 만화책이 요즘 화제다. 현실문화연구에서
펴낸 ‘벼룩만화 총서’가 그것. 작고 귀여운 판형에 1000원이라는 부담 없는 가격으로 만화 매니아들은 물론, 만화에 관심 없던 성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벼룩만화’는 작은 만화책을 지칭하는 말로, 프랑스에서 처음 사용됐다. 현실문화연구의 ‘벼룩만화’ 시리즈는 각 권당 가로 10.5cm 세로
15cm, 총 페이지 24쪽으로 성인 남자의 손바닥에 가볍게 올라오는 부피와 무게다. 현실문화연구가 1차분으로 펴낸 8권을 모두 합해도
웬만한 책 한 권보다 훨씬 더 작고 가볍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외형이나 가격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스러운 외형을 배반하는 ‘파격’에 있다. 기존 만화의 형식과 주제를
철저히 전복하는 신선한 표현과 독창적인 세계관은 판형의 아담함과는 대조적이다.
날카로운 주제의식, 만화적 즐거움은 두 배
범상치 않은 상상력을 담고 있는 이 만화들은 모두 유명한 유럽 언더만화 작가들의 작품이다. 땅끄렐, 드니 부르도, 사르동 스타니슬라스 등
국내 만화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알려진 이름들. 1차분 만으로도 유럽 예술만화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대표작들로 선정되었다.
△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권력이 어떻게 가로막는가를 지적한 ‘이웃들’ △ 삶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금붕어, 죽음을 선택하다’ △
정성이 손쉽게 배신당하는 세태와 희생적인 모성을 표현한 ‘산란주의’ △ 과중한 책임에 지친 가장의 황당하고 유쾌한 일탈 ‘황당한氏 이야기’
△ 생명의 가치가 추락한 현실을 비판한 ‘목매 죽은 꼬마를 위한 발라드’ △ 재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의 본능을 그린 ‘죽음’ △ 정신병리적
가족 구조 안에서 상처 입은 어린이의 세계를 보여주는 ‘엄마는 문제가 있다’ △ 손의 묘사만으로 사형제도의 야만성을 여실히 폭로한 ‘야만’.
작품들은 하나같이 날카롭고 무거운 주제들이지만 만화적 재미는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오히려 단편만화의 팽팽한 긴장감과 반전, 구성의 묘미,
시각적 자극 등은 ‘만화’라는 장르 자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국 예술만화 발전의 기폭제
현실문화연구원은 “획일적이고 평범한 기존 만화의 상상력을 완전히 뒤덮는 작가주의 만화”라며, “앞으로 한국 언더 작가들의 작품도 출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럽의 언더만화는 그동안 높은 예술성과 소재의 다양함으로 세계적인 극찬을 받아왔다. 국내에서는 접할 기회가 적었던 유럽의 예술만화를 감상할
수 있는 대중적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벼룩만화총서’의 의미가 크다.
특히, 시리즈가 연장되면서 언더만화의 흐름과 경향을 정리하는 역할도 톡톡히 하리라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9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싹을 틔어온
한국 언더만화의 발전에도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