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요 속에 인생사가 들어있다”
경기민요의 대가 김금숙 명창
40년 동안 오직 경기민요 소리만을 갈고
닦아온 김금숙(54)명창. 그녀가 경기민요를 처음 만난 것은 버스정류장 앞이었다. 겨우 12살 때 버스정류장 앞 전파사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민요를 듣고 그녀는 감동을 받았다. “멋들어진 가락과 장단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던지 주체할 수 없이 좋았다”는 그녀는 결국 “노래를 배우게
해 달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하지만, 노래는 기생이나 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남아있던 시대였다. 어머니는 반대했지만 “기질이 남달라 말릴 수 없다”는 무당의 말을 듣고
그녀를 청구고전성악학원에 입학시켰다. 이 학원은 서도창의 대가 벽파 이창배 문하의 명문이었다.
13살인 그녀는 학원에서 ‘꼬마’로 불렸다. 심부름을 도맡아했지만 그녀는 노래부르는 재미에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종로에 있는
학원에서 용두동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그녀에게 그날 배운 노래를 복습하는 좋은 연습장이 되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가 전봇대에 부딪쳐서
정신이 드는 경우도 많았어요.” 학원에서 집까지의 거리를 짧게 느낄 만큼 민요 배우기에 열성적이던 그녀는 가사, 시조, 경기 12잡가 등을
이수해 학원의 첫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 그녀가 최초로 노래를 하러 간 곳은 부잣집의 환갑 잔치였다. 어머니의 한복을 빌려입고 아무 것도 모른 체 스승을 따라 간 그녀는
대청마루의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민요가 공연될 수 있는 장소는 별로 없었고 노래하는 사람은 ‘딴따라’라며 천하게 인식됐다.
그녀는 그 후 소리에서 도망치듯 가락을 잊고 결혼 해 버렸다.
열정과 사명감으로 이어진 소리인생
하지만 민요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과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 수 없는 것이었다. 결혼 1년이 조금 지난 즈음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명절 특집
국악 방송을 보게 된 그녀는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데’라는 아쉬움에 사로잡혔다. 소리를 다시 하고 싶은 열망을 가눌 수 없던 그녀는
스승 이창배 선생을 만났다. 스승은 “너를 얼마나 찾은 줄 아느냐”며 덥석 놀라운 제안을 했다. “일본으로 가자”는 것. “그 동안 나이가
미달이었지만 지금은 공연에 참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재일 거류민단 공연에 합류할 것을 권했다.
엄격한 집안의 며느리였던 그녀가 공연을 위해 일본행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앞 뒤 볼 것 없이 꼭 가야했지만
남편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친정 어머니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남편이 출근한 후 도망 나와 버렸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소리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노래와 가정을 병행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여성이 사회 생활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보던 당시의 고루하던 사고방식에 주부로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손가락질 받는 일이었다. 그녀의 딸이자 국악인인 송은주씨는 “학교 조사란에 늘 어머니의 직업을 ‘주부’라고 썼어요. 학교에는
단 한번도 오지 못했고, 가정에서도 어머니를 보기는 힘들었죠”라고 과거를 회상하며 웃는다. 공연을 갖다 와서 그녀는 화장을 지우기에 바빴고,
이웃 사람들에게도 평범한 주부로 보이기 위해 무단히 애를 썼다. “피곤한 기색도 보이지 못했죠. 다들 말리는데 억지로 고집 피우며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집에서 고단해도 밖에 나가 공연할 때는 또 항상 웃어야 했죠.”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경기민요가 좋았다. 추운 겨울 밥을 굶어가며 공연장을 향할 때도, 허름한 분장실에서
노래 연습을 할 때도 단 한번도 소리를 시작하게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소리꾼으로서 특별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 스승의
가르침과 경기민요의 전통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느날 국립국악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녀의 딸이 교과서인 ‘국악통론’을 펼쳐들고 그녀 앞에 내밀었다. “이 사진 엄마 아니야?” 딸이 가리킨
사진은 청구고전성악학원의 졸업기념사진이었다. 그때서야 그녀는 부끄러워 다락에 숨겨놓았던 졸업사진을 처음 꺼내 벽에 걸었다. 졸업생 중에
지금까지 노래를 하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하다.
그녀는 스승의 가르침을 생각해 더욱 매진했다. 그녀가 1964년도 신인예술상을 비롯, 전주대사습대회 장원, 제주 한라문화제 등에서 문화
공부장관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것도 남다른 그녀의 열정과 노력 덕분이었다.
경기민요 전수와 대중화에 앞장서
“민요 속에는 철학이 있어요. 어떤 일이든 전념하다 보면 철학이 생기겠지만, 정말 민요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있답니다” 그녀는 당연히 경기민요
예찬론자다. 민요를 배우면 정신이 맑아지고 어둡던 사람도 쾌할해 진다는 것. 경기민요는 특히 요성(떠는 소리)이나 추성(미는 소리), 퇴성(꺽는
소리)과 같은 표현법들이 간결해 깨끗하고 밝다. 그녀는 이렇게 아름다운 민요가 사라지고 대중가요가 잠식해 가는 세태에 아쉬움이 많다.
“영어나 컴퓨터를 가르치는데는 열성이면서 정작 우리 민요를 교육시키는데는 소홀하다”며 그녀는 정서함양을 위해서도 민요를 기본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경기민요는 가사가 표준어인데다가 탁 틔게 노래를 하기 때문에 언어감각이나 발표력 향상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것.
현재 그녀는 경기민요의 전수와 대중화에 힘을 쏟고 있다. 김금숙 경기민요 연수원에서는 12바탕을 다 배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2년에 한 번씩
발표회와 수료식을 열고 있고, 김금숙 경기민요 합창단도 운영하며 정기 공연도 하고 있다. 강종 문화원에서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12잡가를
보급하는데 반응이 좋다. 경기민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그녀는 보람을 느낀다. 민요란 원래 ‘민중 속에 전승되어 온
가요’를 말한다. 솔직하고 소박한 민요의 전통적인 ‘멋’이 언제까지나 민중 속에 살아서 이어가기를 그녀는 바라며 오늘도 목을 가다듬고 북채를
잡는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