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행위예술 30년사
‘해프닝’에서 ‘퍼포먼스’까지
퍼포먼스가 21세기 문화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학, 연극,
음악, 영화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는 퍼포먼스는 예술과 놀이, 창조와 파괴의 경계마저 허무는 ‘자유의 행위’다. 최근에는
특히 기존 행위예술에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가미한 ‘논버벌 퍼포먼스’가 세계 공연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국내 퍼포먼스의 세계를 총망라한 ‘2002 한국실험예술제’가 8월 7일 ~ 31까지 열려 관심을 끌었다. 성능경, 김영원,
이건용, 무세중 등 국내 행위예술 대표 작가들의 공연과 좌담회, 사진 영상전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그 중 사진 영상전은 한국
퍼포먼스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실험정신의 초석 닦은 60~70년대 장르 교류 활발했던 80년대
국내 첫 퍼포먼스의 역사는 ‘해프닝’으로 시작됐다. 1967년 11월에 열린 ‘청년작가연립전’ 개막식에서 선보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퍼포먼스계에서는 최초의 행위예술 작품으로 본다. 같은 해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는 토플리스 차림의 정강자가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제목의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던 세시봉은 전위적인 옷차림의 예술가들이 자주 모여 기행을 벌였기 때문에
명소였다. 정찬승과 강국진 등은 1968년 꽃으로 장식된 관을 들고 ‘문화인 장례식’이라는 피켓을 앞세운 ‘가두시위’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1960년대 ‘해프닝’이 이처럼 시위적인 행동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가했던 반면, 1970년대의 ‘이벤트’는 일상성의 문제나 동양 사상의
행위적 표현 등이 많았다.
‘퍼포먼스’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1980년대 2세대들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1980년대는 미술, 음악, 마임, 비디오 등 장르의 특성들이
뒤섞이거나 부분적으로 흡수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장르의 교류는 1970년대의 정적인 ‘이벤트’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지만, 여러 장르의
작가들이 행위예술에 뛰어들며 공동작업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석환, 심철종, 무나미, 안치인 등이 1980년대 대표 작가군이다.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입 광역화 다변화되는 추세
1990년대는 퍼포먼스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시기다. 1980년대 초반 광주민주항쟁으로 촉발된 정국 불안이 가시고 개인적 취향이 앞서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입으로 젊은 작가들은 행위예술을 사적 담론을 위한 매체로 선택했다. 특히 이윰이나 이불 같은 작가들은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감각을 보여주었다.
이후 김백기, 문재선, 신용구 등 4세대 작가들이 쏟아졌다. 현재 행위예술은 조용한 변혁이 일고 있는 중이다. 비디오, 인터넷, 컴퓨터,
팩시밀리, 통신위성, 신디사이저 등 매체와의 결합도 점차 광역화 다변화되는 추세다. 특히 예술이 일상 공간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국내 퍼포먼스계는 현재까지도 미술가들이 주도하고 있지만, 일반인을 비롯, 작가층도 점차 확대될 전망이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