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은 영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
한국영화 녹음계의 거장, 이영길 기사
“세살 짜리 아이도 녹음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녹음은 평생을
해도 어렵다.”
완성을 꿈꾸며 끝없이 미완의 작업을 되풀이하는 것이 녹음의 매력이라는 이영길(61) 기사는 지금까지 100여편 정도 한국영화의 ‘소리’를
맡아온 녹음계의 거장이다.
1973년 일본 동경 아오이 스튜디오에서 녹음관계전반의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온 그는 1974년 ‘사랑이 있는 곳에’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가고파’ ‘기쁜 우리 젊은날’ ‘칠수와 만수’ 등으로 각종 녹음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녹음 기사로 자리를 굳혔다. 1983년 한국방송사상
최초로 동시녹음 작품인 ‘서울이여 영원하라’의 녹음을 담당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6년에는 제10회 아시아 경기대회 공식기록 영화의
녹음을 맡아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이어 변영주 감독 작품 ‘밀애’의 녹음 기사로 참여하고 있다.
“기술뿐 아니라 감각 필요하다”
그에게 충무로 입성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에 매료됐던 그는 부친의 대를 이어 영화녹음 작업을 하게 됐다. 그의
부친인 이경순씨의 삶은 한국영화 녹음의 발전사 그 자체다. 1940년대부터 녹음 작업을 시작했던 이경순씨는 1962년 예장동에 한국 최초의
영화 녹음 스튜디오인 한양녹음실을 만든 장본인이다. 현재 이영길 기사가 운영하고 있는 한양스튜디오의 전신인 한양녹음실은 한국영화의 70∼80%를
담당했던 녹음계의 최고봉이었다.
아버지를 도와 어려서부터 녹음 기술 전반에 익숙했던 그는 일본에서 선진 녹음 기술을 전수 받고 돌아와 한국 영화의 녹음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을 받았다. “마라톤 선두주자는 늘 외롭다”는 그는 인터넷도 마땅한 교재도 없는 상황에서 몸으로 부딪치고 각국을 돌며 직접 뛰어들어 녹음
기술과 감각을 익혔다.
그는 “영화와 녹음이 너무 좋아 힘든 것도 몰랐다”며 평생 “어떻게 하면 헐리우드 영화 같이 뛰어난 녹음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 속에서
소리와 씨름하며 살았다. 그동안 한국영화도 발전했고, 녹음 기술도 향상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디지털 기술이 대거 유입됐고, 5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새로운 장비들이 쏟아졌다. “새로운 기계도 좋지만, 녹음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소리에 대한 감각이 필요한 작업이다.” 최소한
20∼30년간 소리를 다루어야 제대로 된 감각을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기계에만 의존하려는 요즘 영화계의 세태가 걱정이다.
“아날로그의 맛도 알아야 한다”
유럽이나 일본의 영화 제작 현장에서는 구식 카메라나 녹음 장비 등으로 작업을 하는 베테랑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의 기계는 헐었지만
소리는 전혀 낡지 않았다”고 이영길 기사는 말한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나 새것에 집착하고, 옛것을 빨리 버리고 잊어버린다”며 그는 “바로
만든 김치와 숙성된 김치의 맛이 다른 것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녹음 방식은 각각의 매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거칠지만 현장감이 넘치는
후시녹음과 깊은 맛이 나는 아날로그 녹음 방식을 선호한다.
녹음 부분을 소홀히 하는 충무로의 제작 환경도 아쉽다. 그는 ‘감독’이라는 호칭을 극구 사양하며, ‘기사’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는데, 충무로
시스템에서 기술스텝에게 ‘감독’의 호칭은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성을 쏟아서 한 장면 한 장면을 마무리하기보다는 대체로 저렴함과
신속함을 요구하는 제작 풍토에서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내기는 어려움이 많다.
특히, “영화계는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성향이 가장 큰 문제”라고 그는 지적했다. 음량을 조절하고 혼합하는 믹싱 작업에서 가장 부딪침이 많다.
“믹싱 기술자는 현장에서 녹음을 경험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그는 프랑스의 믹싱과 프린팅 기술을 도입했던 ‘이재수의 난’의 녹음에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때 프랑스의 믹싱 기술자는 10년 이상의 현장 경력을 가진 전문가여서 좋은 소리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다는 것. “좋은
소리는 혼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그는 강조한다.
“모범 보이는 선배 되고 싶다”
30여년간 100여편 남짓한 영화를 만들었으니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을 법하다. 대부분 ‘사건’은 보다 실감나는 음향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됐다.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날’ 촬영장에서는 안성기의 ‘수난’이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황신혜가 거짓말하는 안성기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었다. 그는 안성기에게 어금니를 잘 물라고 귀뜸하고 황신혜에게 힘차게 때리라고 요청했다. ‘짝’하는 소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너무 말을 잘 들은’ 황신혜가 엄청난 파워로 후려치는 바람에 감독이 웃음을 터뜨려 NG가 나고 말았다.
안성기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칠수와 만수’에서도 있었다. 소주를 따서 마시는 장면이었는데, 그는 생생한 병따는 소리를 위해 안성기에게 진짜
소주병을 딸 것을 권했다. 술이 약함에도 흔쾌히 이를 수락한 안성기는 거듭되는 NG에 취해버렸다. 안성기는 다음날까지 술취한 상태로 촬영장에
나타났는데, 마침 그날 촬영 장면이 술이 덜 깬 모습을 연기해야하는 부분이었다. 실제인지 연기인지 모를 안성기의 모습에 촬영은 순탄했다고
한다.
그는 “몸을 사리지 않았던 배우들이 고맙다”며, 영화를 위해 모두가 힘을 쏟았던 기억들을 즐겁게 떠올렸다. 지금까지 그가 ‘돈도 안 되는’
영화녹음에 평생을 바쳐온 것도 한국영화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런 순수한 애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1975년부터 서울예술전문학교, 한양대 청주대 예술대학, 부산경성대의 연극영화과에서 강의를 하며 후배양성에 힘을 쏟았던 그는 현재 충무로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다. 한양스튜디오에서도 5명 정도의 조수를 구하고 있는데 도통 녹음을 하겠다는 인력이 없다는 것. 그는 “빵이 안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0여명의 조수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작업이 없는 날에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며 생활비를 보충하고 있다. 제1조수가 아파트 전기 배선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충무로 제작 시스템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때문에 “든든한 후배들을 양성하고 모범을 보이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그의 평범해 보이는 바람은 사실 한국영화계에서 실현이 쉽지 않은 소망이다. 하지만, 후배양성에 대한 소망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그의 꿈이자, 한국영화계의 꿈이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