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월11일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의례적인 행사는 생략하겠다”며 취임식 대신 e-메일로 취임사만 배포하는 행보로 업무를 시작해 ‘역시 이헌재’라는 기대가 컸다. 경기회복의 ‘해결사’로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전권을 위임받은 이 전 부총리가 안으로는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렸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충격을 금치 못한다.
경제 해결사로 화려하게 등장한 지 1년여만에 비난여론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헌재 발 부동산 투기의혹의 폭풍은 끝나지 않았다. 정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고위직이 재산증식에 유리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25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고위공직자 재산변동사항 공개에서 상위 20여명 중 12명이 부동산을 통해 재산을 불렸고, 이어 28일 공개된 대법원공직자윤리위원회 고위법관 재산등록 변경사항에는 사법부도 고위법관 10명 가운데 4명이 부동산 상속이나 시세차익으로 재산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정무위원회 전병헌 의원(열린우리당)에 따르면 부동산 정책과 관련이 높은 재경부, 건교부 4급 이상 고위공무원들의 거주 현황을 분석한 결과 전제 273명 중 104명이 서울 강남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개발정보 ‘특권’ 이용해 투기
논란이 된 이헌재 전 부총리만 하더라도 지난 1년간 4억7,268만원의 재산이 늘어 총액이 91억이 넘었다. 지난 1998년 금융감독원장 시절의 재산이 25억5,194만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6년 만에 65억5,506만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재산증식은 대부분 부동산 매매에 의한 것인데, 이 전 부총리가 소유하고 있는 연립주택과 오피스텔, 임야, 전·답 등을 모두 시가로 환산할 경우 재산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 전 부총리를 사퇴로 이끈 결정적인 이유는 위장전입·명의신탁 등 전형적인 부동산 투기수법을 썼다는 의혹에서 비롯된다. 위장전입과 명의신탁을 통해 광주시 지월리의 임야 전답을 매입해 46억원의 시세차익을 챙겼고,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는 지역특화발전특구위원회에서 작년 12월30일 자신이 회의를 주재하고 전북 고창군의 공음면, 선동리, 용수리 일대 207만평을 경관농업특구로 지정했다. 이 지역은 이 전 부총리의 가족들이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재산등록 신고에 딸은 한 번도 신고된 적이 없고 2000년 이후부터 아들과 딸 모두 재산이 신고 되지 않아 재산증여를 통한 재산증식이 더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낳고 있다.
이 때문에 경제 정책과 부동산 정책을 총괄하는 이 전 부총리에 대한 정책에도 신뢰성을 잃고 있다. 토지정의시민연대는 지난 3일 정부종합청사 후문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 전 부총리는 그동안 경기활성화라는 명목으로 골프장 건설에는 적극 찬성한 반면, 개혁적 입법이라고 평가되는 1가구 3주택 양도세 중과세, 부동산 보유세 강화, 아파트 원가공개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해 왔다”며 “이러한 일련의 주장이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에 주목한다”고 밝혔다.
경제정의시민연합은 김세호 건교부차관 등 개발정보를 이용한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고 있는 공직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책임추궁을 촉구했다. 이번 공직자 재산공개 결과를 보면, 특히 토지수용보상을 통해 재산이 증식된 공직자가 많다.
공공택지 등 개발행정을 총괄하는 김세호 건교부차관은 서울시 장지택지개발지구 지정을 예고하기 불과 3개월 전인 2001년 11월 부인 명의로 취득한 700여평의 땅을 통해 11억원의 시세차익을 누린 것으로 나타나 개발정보를 이용한 땅투기 의혹이 농후하다는 시선을 받고 있다. 문정일 해군참모총장, 김승의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등은 판교 신도시에서 사전에 토지를 구입해 막대한 차익을 챙겼으며, 한준호 한전 사장은 구미시에서, 박봉수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성남시에서 토지보상금을 통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긴 것으로 나타났다고 경실련은 지적한다.
경실련은 “최근 동탄, 판교 등 국민주거안정을 위해 정부가 시민들의 땅을 강제로 수용한 공공택지가 국민주거안정에 기여하지 못한 채 분양가를 폭등시키고 부동산 투기의 장으로 전락해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며 부동산 정책 수립이 잘못돼 가고 있음을 꼬집는다.
공직자윤리법과 백지신탁제 도입해야
수도권에서 조성되는 공공택지에서 개발정보를 이용한 사전토기 투기, 공공택지 주변지역에 대한 땅 투기를 통해 시세차익을 노리는 행위는 부동산 투기의 전형적인 사례다. 공공택지 등 개발지구에서의 투기는 정확한 정보를 얼마나 빨리 알고 있느냐에 따라 시세차익의 정도가 결정되기 때문에 직위를 통해 개발정보를 획득한 공직자들이 친인척 명의로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온 것도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경실련은 “토지보상금을 통해 재산을 증식한 공무원들에 대해서 구입시기와 판매시기, 구입가, 세금납부 여부 등을 철저히 조사하고 투기 여부에 따라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정부는 판교 등 수도권 공공택지의 보상금 지급현황 등을 전면적으로 조사해 공무원들의 부동산 투기를 발본색원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고위공직자의 부동산 투기 등 재산형성 의혹이 잇따라 제기됨에 따라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공직자의 사적 이해추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토지전문가인 가톨릭대 전강수 교수(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은 “근본적으로 정보가 빠른 고위직에게 유리하게 작용되는 현 토지관련 제도를 바꾸고 공직자 재산공개도 투명하게 돼야 한다”면서 “현재는 직계 존비속은 고지를 거부할 수 있게 돼 있으나 존속인 부모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비속, 자기 자식들에 대한 재산은 공개하는 게 맞다”고 주장한다.
여야 정치권에선 공직자들의 재산형성 과정을 의무적으로 소명토록 하는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하고 백지신탁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9일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투명사회협약’ 체결식에서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해 재산형성 과정에 대한 심사를 강화하고 주식백지신탁제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혀 변화가 예상된다.
민노당은 향후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백지신탁제 도입 ▲재산공개와 관련한 현행 공직자윤리법 제도 개선 ▲재경부 등의 고위 관리들의 퇴직후 취업 제한 범위 확대 등을 추진할 방침이다.
홍경희 기자 metell@sisa-news.com